1869년 이후 사간원 대사간을 지내면서 양사연차(兩司聯箚)로 최익현(崔益鉉)을 죄줄 것을 주청하였다. 이후에 1880년에 종성부사(鐘城府使)와 1882년에는 예조참의에 올랐다.
그러나 동년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을 3년간 맡았는데 특히 갑신정변의 주동자를 처벌하자는 주청을 하였다. 1890년에 부호군(副護軍)으로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었다. 1908년에는 한때 죄인이 되었다가 황제태묘알서고(皇帝太廟謁誓告)가 있는 후에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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