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호는 석간(石磵)·서하옹(棲霞翁). 평장사 조맹(趙孟)의 31대손이며, 이인복(李仁復)의 문인이다.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해 안동서기(安東書記)가 되었다. 합문사인(閤門舍人: 고려 시대에, 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던 관리)을 거쳐서 1361년형부원외랑에 올랐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피난하던 왕을 호종해 1363년에 2등공신이 됐다. 이듬해에 국자감직강이 되었고 이어서 전라·서해(西海)·양광(楊廣)의 삼도안렴사(三道按廉使)를 지냈다.
1374년(공민왕 23)에 전법총랑(典法摠郎)으로서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石磵)·서하옹(棲霞翁)이라 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하며 이때에 「기우도찬(騎牛圖贊)」·「석간가(石磵歌)」 등의 시를 지었다. 1377년(우왕 3)에 다시 등용되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됐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있다가 1380년에 사임하고,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으로 퇴거했다. 그곳에서 판교원(板橋院)·사평원(沙平院)을 중수할 때에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일컬으면서 떨어진 옷과 짚신으로 역부들과 함께 일했다.
1388년에 다시 전리판서(典理判書)로 기용됐으며 밀직제학(密直提學)에서 서해도관찰사로 내려가서 왜구를 토벌하는 공을 올렸다. 이듬해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올랐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으며, 1392년 조선개국 후에 강릉부사에 임명됐다.
이듬해에 병을 핑계되고 사직해 광주로 내려갔다가 다시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이 되었다. 그 뒤로 관직에서 떠나 여생을 보내다가 스스로 묘지를 짓고 73세에 죽었다.
현전하는 조운흘의 작품으로는 5수의 칠언절구가 『동문선』에 보인다. 「제구월산소암(題九月山小庵)」·「송춘일별인(送春日別人)」 등의 시편을 살펴보면, 현실참여와 은둔 사이에서 고민하며 이를 자연을 매개로 해결하고자 하는 흔적이 나타난다.
조운흘의 생애가 말해주듯 고려 말의 전환기에 선 지식인의 형상이 잘 그려져 있는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는 저작이 거의 인멸되었기 때문에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표적인 문인으로서 그의 존재가 선명히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조운흘이 남긴 저서로 『석간집(石磵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편서로는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전한다. 이것은 최해(崔瀣)의 『동인지문(東人之文)』 중에서 「오칠(五七)」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최해의 비점(批點)이 그대로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