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치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후기, 몽골제국의 역참 제도로 고려와 몽골의 수도를 잇는 역로망.
이칭
이칭
잠치
제도/관직
설치 시기
1259년 이후
폐지 시기
고려 말기
내용 요약

참치는 고려 후기에 몽골제국의 역참 제도로 고려와 몽골의 수도를 잇는 역로망이다. 몽골과의 화친 조건으로 요구받았다. 1259~1263년 사이에 개경에서 의주에 이르는 약 40개 소의 역을 두어 설치되었다. 이후 부담이 커지자 20개 소로 축소되었다.

정의
고려 후기, 몽골제국의 역참 제도로 고려와 몽골의 수도를 잇는 역로망.
임무와 직능

몽골은 정복으로 넓어진 영토를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참치〔站赤〕'라고 하는 역제를 운영하였다. 길 또는 역을 의미하는 잠〔yam〕과 ‘잠의 사람’이라는 뜻의 잠치〔yamchi〕가 각각 역참(驛站) 또는 참역(站驛), 그리고 참치로 번역된 것이다.

고려는 초기부터 개경을 중심으로 22개의 주1, 525개의 역(驛)을 근간으로 하는 역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고려의 역제가 몽골과의 평화적인 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몽골의 주2, 곧 참치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고려의 수도 개경과 몽골의 수도인 대도를 잇는 주3망이 원종 대에 마련되었는데, 고려 전역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의 수도를 오가는 일종의 간선 교통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와 몽골 사이에 놓인 역참은 크게 주4주5의 체계로 40여 곳에 달한다. 주도로는 '개경― 서경―의주―동경(현재의 요양)'을 거치는 경로로, 대략 18~23개의 역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우회로는 '개경―함흥―황초령―만포―용양행성 개원로'로 이어지는 경로로, 개경에서 함흥 지역을 거쳐 동계의 끝인 정주까지는 대략 18, 19개의 역이 있었다.

우회로는 카단의 반란 당시에 개원로의 역참이 파괴되자 고려의 역참을 통해 만주 지역이 대도와 소통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주도로와 우회로에 위치한 역의 수는 40곳 안팎이 된다. 기본적으로 고려의 영토 안에 마련된 역로는 고려가 관리하였지만, 몽골이 동녕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몽골의 영토가 된 지역에 있는 역로망에 대한 부담도 여전히 고려가 지고 있었다.

몽골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는 역참을 관장하는 토드코순의 설치나 수역 설치 등과 같이 고려 역참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일본 원정, 1290년대 중국 강남 지역과 고려, 요동을 잇는 대량의 곡식 운 송과정에서 몽골이 탐라나 압록강 어구 등에 주6을 설치하여 수송을 직접 관리하기도 한 것이다.

참치에는 대체로 100~170필 정도의 역마를 구비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역마를 이용할 수 있는 증빙물이라 할 패부(牌符), 포마성지(鋪馬聖旨), 포마차자(鋪馬箚子) 등이 있어야 하였다. 고려의 왕은 이러한 증빙물을 사신에게 발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변천 사항

몽골은 정복지에 대해 속칭 ‘6사’로 불리는 여러 가지의 사항을 화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데, 역참의 설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는 초기부터 역제를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6사’ 중 역참의 설치라는 요구 조건에는 신속하게 응할 수 있었다. 1259년에 태자였던 원종을 통해 고려가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면서 역참에 대한 요구가 나왔는데, 실제로 이해 8월에 몽골의 장수 예수테르〔也速達〕가 개경에서 몽골로 돌아가면서 역참 시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263년(원종 4) 4월에 고려가 북쪽 경계에서 ‘치우(置郵)’, 곧 역의 정비가 끝났음을 몽골에 강조하였으니, 1259년에서 1263년 사이에 고려에서 몽골을 잇는 역참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대략 40곳으로 역참을 마련하였으나, 1281년(충렬왕 7)에 충렬왕이 몽골 조정에 40곳에 이르는 역참에 있는 백성과 가축의 피해가 크다는 점을 알리자, 20참으로 축소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는 고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우회로를 역참에서 제외하고 개경과 의주 간 경로의 20여 곳을 중심으로 정비한 것이다.

의의 및 평가

무엇보다 참치에 대한 논의는 고려와 몽골 관계를 평가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고려의 역제에 몽골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은 일찍부터 지적된 바이지만, 모리히라의 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몽골에서 개경이 이르는 참치의 경로를 복원하면서 경로상에 위치한 대부분의 역이 몽골의 의도에 따라 설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고려의 역로망이 주7 전체의 역참 체제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원종 대 이후 신설된 역의 대부분은 고려와 몽골 전쟁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서경 이북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외의 지역은 고려 전기 이래의 역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으며, 고려의 역로망에 대한 몽골의 개입이나 관리가 항상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리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돌베게, 2010)

논문

정동훈, 「고려 사신의 몽골 잠치 이용」(『사학연구』 134, 한국사학회, 2019)
이강한, 「1293~1303년 고려 서해안 ‘원 수역’의 치폐와 그 의미」(『한국중세사연구』 33, 한국중세사학회, 2012)
정요근,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원의 개입과 그 의미」(『역사와 현실』 64, 한국역사연구회, 2007)
森平雅彦, 「高麗のおける元の站赤―ルートの比定を中心に―」(『史淵』 141, 2004)
주석
주1

역을 관리하기 위한 별도의 행정구역. 우리의 전근대 사회에서 일반 행정구역과는 별도로 교통 통신을 위한 행정구역과 군사적 목적에 따라 나누어진 각각 별개의 도(道)가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역도(驛道)란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혹은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하나의 역도에 편입한 상태에서 최고 관리자가 이를 담당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역도(驛道)를 관장하는 관리로는 종9품의 역승(驛丞)이나 종6품의 찰방(察訪)을 두고 있었다.

주2

몽골과 원나라가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역참을 설치한 제도. 전역에 설치된 역참은 관리나 사신에게 숙식이나 교통수단을 제공하였고 동서 문물 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말샘

주3

역마(驛馬)를 바꿔 타는 곳과 통하는 길.    우리말샘

주4

어떤 지역이나 지점에 이르는 주된 도로.    우리말샘

주5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 길.    우리말샘

주6

전국 각지의 세곡(稅穀)을 서울까지 배로 운반할 때, 중간에 배를 쉬게 하던 곳. 서울과 경기도의 주요 나루와 조운선이 왕래하는 곳에 설치하였다.    우리말샘

주7

13세기 초에 칭기즈 칸이 현재의 외몽골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쳐 세운 제국. 몽골과 중국 본토를 직할령으로 하고 정복지를 네 개의 한국(汗國)으로 나누어 지배하였으며, 세조 때에 북경(北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원(元)으로 고쳐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4세기 말에 명나라에 쫓기어 패퇴하면서 제국도 분열하였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보광(가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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