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도감 ()

목차
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흥왕사(興王寺)와 관련한 것으로 보이는 임시 관청.
제도/관청
설치 시기
고려 전기
폐지 시기
고려 후기
내용 요약

흥왕도감은 고려시대, 흥왕사(興王寺)와 관련한 것으로 보이는 임시 관청이다. 고려 전기, 늦어도 인종 대에 그 존재가 드러난다. 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을 갖추고 있었으며, 고려 후기까지 유지되었다. 흥왕사와 관련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정의
고려시대, 흥왕사(興王寺)와 관련한 것으로 보이는 임시 관청.
기능과 역할

인종 대의 주1에서 흥왕도감사 등에 대한 지급 규정을 찾을 수 있는 반면에 1076년(문종 30)의 녹봉 규정에서는 지급 규정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1076년에서 인종 대 사이에 흥왕도감이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종 대의 권무관록에서 흥왕도감의 사(使)는 60석, 부사(副使)는 40석, 판관(判官)은 13석 5두로 지급받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에 따라 흥왕도감은 사, 부사, 판관의 직제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흥왕도감의 역할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문종 대에 창건된 흥왕사(興王寺)와 관련을 지어볼 수 있으나, 역시 잘 알 수 없고, 설치 및 폐지 시기와 기능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217년(고종 4)에 거란이 주2을 침범하였을 때 판관(判官) 주효엄(周孝嚴)이 이를 물리쳐 흥왕도감판관(興王都監判官)에 오른 사실로 미루어 그 이전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362년(공민왕 11)에 갑과권무(甲科權務)로서 판관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변천사항

1217년(고종 4)에 청새진판관(淸塞鎭判官) 주효엄을 흥왕도감판관에 임명한 사례를 비롯하여 양택춘(梁宅椿)을 흥왕도감에 임명하거나 충숙왕 대에 유보발(柳甫發)이 흥왕도감판관을 지낸 사례를 찾을 수 있어, 인종 대 이래 흥왕도감이 고종 대에도 존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362년(공민왕 11)에 흥왕도감의 판관을 갑과권무(甲科權務)로 하는 정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다른 관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양택춘묘지명(梁宅椿墓誌銘)」

단행본

문형만, 『고려제사도감각색연구』(제일문화사, 1986)
주석
주1

고려 시대에 품관(品官)과 이속(吏屬) 사이에 위치하는 준품관적인 직제에게 지급되던 녹봉. 임시 관서의 성격을 띠는 여러 사(司)나 도감(都監)의 실무직에 종사하는 권무관(權務官)의 녹봉은 10등급으로, 최고 60석에서 최하 6석이 있었다.    우리말샘

주2

고려 경종 때에,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평안북도 희천(熙川)에 설치한 진성(鎭城).    우리말샘

집필자
김보광(가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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