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윤씨가에 낱장으로 전해오던 고신 10점을 후손이자 당시 문신인 윤행임(尹行恁, 1762~1801)에 이르러 첩으로 제작되었다.
첩(크기: 세로 48.32㎝, 가로 33.2㎝)의 첫 면에 윤행임이 “장황하여 가묘에 보관하여 길이 보배로 삼고자 한다.”라는 취지의 내용을 직접 쓴 제사가 수록되어 있다. 태종 대에 윤임에게 발급된 고신 2점과 인조 대에 윤계에게 발급된 고신 8점이 연이어 수록되어 있다. 고신은 관직 임명장을 말하며, 크기는 세로 40.4㎝, 가로 66.5㎝이다.
윤임의 왕지 하나는 1402년 4월 16일에 윤임을 ‘가선대부 황주목사 겸 권농병마단련사’에 제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409년 2월 25일에 윤임을 ‘통훈대부 인녕부 우사윤’에 제수한다는 것이다. 이 두 점의 고신은 첫 머리에 적힌 왕지라는 문구와 조선국왕지인이 안보되었다.
왕지는 충렬왕 대에 처음 등장하는 용어인데 충렬왕 당시 몽골제국의 부마국으로서의 지위에 맞추어 이전에 선지(宣旨)라 칭하던 왕명을 왕지로 낮추어 부른 것이다. 이 왕지가 세종 대에 이르러 교지로 바뀌고 19세기 말까지 지속된다. 한편 조선국왕지인은 조선 전기 고신 가운데에서 가장 빠른 사례로서 주목된다.
한 문신의 집안에서 자기 집안에 전해 오던 조상의 고신을 가보로 여겨 첩으로 보존하려 하였다는 계보 의식은 조선 후기 전통을 창조해 나가려던 문화 현상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윤임윤계고신첩’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명명되어 보관되어 있으며, 1998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