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금신보 ()

한금신보
한금신보
국악
문헌
1724년, 응천 후인이 자신의 거문고 스승인 한립의 악보를 토대로 편찬한 금보.
문헌/고서
편찬 시기
1724년
간행 시기
1724년
편저자
응천 후인
권책수
1
권수제
한금신보
판본
필사본
표제
한금신보
소장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한금신보는 1724년 응천 후인이 자신의 거문고 스승인 한립의 악보를 토대로 편찬한 금보이다. 이 악보는 『금보신증가령』(1680년)과 『유예지』(1806~1813년 추정) 사이의 대엽류 가곡, 「보허자」, 「영산회상」 등의 거문고 음악의 변천과 18세기 전반 양반과 중인이 중심이 된 풍류방 음악의 일단을 밝히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정의
1724년, 응천 후인이 자신의 거문고 스승인 한립의 악보를 토대로 편찬한 금보.
저자 및 편자

한금신보(1724)주1는 응천(凝川) 후인(後人)이 편찬하였으며, 이 책에는 17세기 후반에 마포 강가의 수명정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립(韓立 또는 韓笠)의 거문고 음악이 수록되어 있다. 그 당시 수명정은 거문고 음악이 활발히 연주되던 장소였으며 많은 풍류객들이 찾는 곳이었다. 응천 후인은 어릴 적에 마포의 수명정에서 성장했으며, 거문고에 관심을 품었지만 정식으로 거문고 스승을 만나지 못하였다.

응천 후인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없지만 응천 후인은 박이서의 후손 중 하나로 주2 1616년(광해군 8년) 수명정의 창건자로 알려진 박이서(朴彛叙, 1561~1621)의 본관이 밀양인데, 밀양의 옛 이름이 응천이었다고 한다.

서지사항

세로 29㎝, 가로 22.5㎝, 1책 54면, 한장본(韓裝本)이다.

편찬 및 간행 경위

한금신보는 1724년(경종 4년) 응천 후인(밀양 박씨 후손)이 자신의 스승인 한립의 거문고보를 토대로 편찬한 악보이다. 응천 후인은 한립의 거문고보를 구하여 빠진 부분을 보완하였다. 서문에는 중국의 고금(古琴)과 우리나라의 거문고 및 악(樂)에 대한 이론적인 내용인 금론 및 악론을 포함하고 있다.

편찬의 주요 목적은 개인적인 음악 교육을 넘어서 국가의 음악 담당자들을 위한 음악 지식 함양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의 악을 주관하던 유생들 대부분이 음악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비판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려는 목적을 두고 있었다.

구성과 내용

한금신보의 앞부분에는 중국의 고금, 악(樂), 거문고 등에 대한 음악 이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거문고의 유래, 연주 규범, 연주 방법, 그리고 주3 등의 내용은 거문고 이론을 공부하고 실제 연주 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주4

수록 곡은 다음과 같다. 「 만대엽(평조:속칭 느ᄌᆞᆫ한닙)」 · 「평조 중대엽 제1·2·3)」 · 「평조 (속칭 뒤뎐, 혹칭 후정화) 제1·2」 · 「평조 삭대엽 제1·2·3」 · 「우조 중대엽 제1·2·3」 · 「우조 북전 제1·2」 · 「우조 삭대엽 제1·2·3·4」 · 「평조계면조 중대엽 제1·2·3」 · 「평조계면조 북전 제1·2」 · 「평조계면조 삭대엽 제1·2·3」 · 「우조계면조 중대엽 제1·2·3」 · 「우조계면조 북전 제1·2」 · 「우조계면조 삭대엽 제1·2·3·4」 · 「평조계면조 역괘전」 · 「평조 삭대엽(李好善譜)」 · 「 보허자(우조팔편)」 · 「보허자 본환입(속칭 밋도드리)」 · 「보허자 삭환입(속칭 ᄌᆞᆫ도드리)」 · 「보허자 제지(속칭 ᄀᆞ락더리)」 · 「 영산회상 우조계면조」 · 「영산회상 환입(再三還入可也:도드리)」 · 「영산회상 제지(가락더리)」 · 「 여민락 우조 제1장」 · 「여민락 우조 제2장」 · 「조음(속칭 다ᄉᆞ림)」 · 「조음 우조」 · 「조음 우조」 · 「조음 우조」

한금신보에는 이전 시기 악보에서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악곡들이 포함되어 있다. ① 「우조 삭대엽」 : 이 악곡은 제1~제4로 분화되었으며, 각각 현행 가곡의 변주곡에 주5 특히, 「우조 삭대엽」 제1은 거문고의 유현 4괘로 연주되었지만, 「우조 삭대엽」 제4는 거문고의 유현 7괘로 연주되는 변주곡으로, 조선 후기 음악의 고음화 현상을 보여주는 악곡 중 하나로 소개되기도 주6 ② 「보허자 본환입」 : 이 악곡은 거문고의 유현 4괘를 중심으로 연주되는 현행 「밑도드리」, 곧 「본환입」과 주7 ‘환입’은 우리말로 ‘도드리’라는 뜻이다. ③ 「보허자 삭환입」 : 이 악곡은 거문고의 유현 7괘를 중심으로 연주되는 현행 「웃도드리」인 「세환입」과 주8 ④ 「보허자 제지」 : 이 악곡은 현행 「우조 가락환입」의 모체로 추정되었다. ‘제지’는 ‘가락더리’라는 뜻이다. ⑤ 「영산회상 환입」과 「영산회상 제지」 : 이 두 악곡은 「영산회상」의 가장 이른 시기의 변주곡들로 주9

의의 및 평가

한금신보는 『금보신증가령』(1680년)과 『유예지』(1806~1813년 추정) 사이의 「만대엽」, 「중대엽」, 「북전」, 「삭대엽」, 「보허자」, 「영산회상」 등의 거문고 음악의 변천 과정을 밝히고, 18세기 전반, 양반과 중인이 중심이 된 풍류방 음악의 일면을 밝히는 데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참고문헌

원전

『한금신보』 (『한국음악학자료총서』 18, 국립국악원, 1985)

단행본

이혜구, 「한금신보의 우조삭대엽」(『장사훈박사 회갑기념 동양음악논총』, 한국국악학회, 1977)

논문

김지연, 「한금신보 본환입 박자고」(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
문숙희, 「17세기 이후 현악보허자의 리듬변천에 관한 연구」(『한국음악연구』 44, 한국국악학회, 2008)
성유진, 「한금신보의 영산회상환입과 유예지의 삼현회입」(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6)
손태룡, 「한금신보의 보허자제지 고」(『한국음악사학보』 11, 한국음악사학회, 1993)
송방송·김형동, 「한금신보의 영산회상·환입·제지에 대한 비교 고찰」(『음악연구』 6, 한국음악학회, 1988)
신현남, 「한금신보의 보허자 본환입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5)
임병옥, 「한금신보 우조삭대엽의 재고」(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최선아, 「『한금신보』 (1724) 편찬자의 음악적 배경」『한국음악사학보』 51, 한국음악사학회, 2013)
최선아, 「『한금신보』의 금론 및 악론 연구」(『동양음악』 36,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2014)
한명희, 「한금신보해제」(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68)
주석
주1

한명희는 『금보신증가령』(1680)과 『유예지』 수록 악곡의 선율과 기보법 비교를 통해서 『한금신보』의 편차 연도 갑진(甲辰)년을 두 악보의 중간 시기인 1724년으로 해석하였다. 한명희, 「한금신보해제」(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68)

주2

최선아, 「『한금신보』 (1724) 편찬자의 음악적 배경」『한국음악사학보』 51, 한국음악사학회, 2013)

주3

음악의 연주나 발표, 보존, 학습 따위를 목적으로 일정한 약속이나 규칙에 따라 기호를 써서 악곡을 기록하는 방법. 우리말샘

주4

최선아, 「『한금신보』의 금론 및 악론 연구」(『동양음악』 36,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2014)

주5

이혜구, 「한금신보의 우조삭대엽」(『장사훈박사 회갑기념 동양음악논총』, 한국국악학회, 1977)

주6

임병옥, 「한금신보 우조삭대엽의 재고」(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주7

신현남, 「한금신보의 보허자 본환입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5); 김지연, 「한금신보 본환입 박자고」(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

주8

손태룡, 「한금신보의 보허자제지 고」(『한국음악사학보』 11, 한국음악사학회, 1993)

주9

송방송·김형동, 「한금신보의 영산회상·환입·제지에 대한 비교 고찰」(『음악연구』 6, 한국음악학회, 1988); 성유진, 「한금신보의 영산회상환입과 유예지의 삼현회입」(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6)

관련 미디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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