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 정전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에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세운 경기전의 사당이다.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기전은 태조의 관향인 전주에서 1410년(태종 10)에 창건되었다. 1442년에 지금의 경기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경기전은 정전, 별전, 부속채 등 세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정전은 경기전의 중심으로 어진을 봉안하고 제례를 지내는 공간이다. 정전의 구성은 정청과 정자각, 익랑, 월랑으로 이루어졌다. 경기전 정전은 공포의 세부 수법과 구조가 17세기 초 중건 때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기전은 1410년(태종 10)에 창건되었다. 1409년(태종 9)에 태조의 관향인 완산부(전주)에서 태조 어진을 봉안하기를 청함에 따라 경주 어용전(집경전)의 어진을 모사하여 이듬해 경기전을 완공하고 정전에 어진을 모셨다.
경기전의 본래 이름은 어용전(御容殿)이었다. 1412년에 태조진전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1442년(세종 24)에 지금과 같이 경기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해 9월, 전국적으로 진전의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지는데 경기전도 이때 중수하여 이듬해 10월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러나 경기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14년(광해군 6)에 경기전을 중건하고 전란을 피해 이안하였던 어진을 다시 모셨다.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경기전은 철종 5년과 7년에 수리가 있었다. 고종 연간에도 수차례의 공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1872년(고종 9)에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다시 모시면서 대대적으로 중수가 이루어졌다. 이때 정전 내 어진을 모시는 침실(寢室)의 바닥을 온돌에서 대청으로 바꾸고 부식된 기둥 2개도 교체하였다. 번와와 단청도 새롭게 하였다. 당시 공사는 4개월 정도 소요되었는데 『조경묘경기전수리등록(肇慶廟慶基殿修理謄錄)』(1872년)에 공사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경기전은 정전, 별전, 부속채 등 세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정전은 경기전의 중심으로 외신문, 내신문, 정전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정전은 정청과 정자각, 익랑, 월랑으로 이루어졌다.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일자집이며, 어칸 전면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첨각이 덧대어져 능침의 정자각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전의 좌우에는 2칸의 익랑과 4칸의 월랑이 마당을 위요하여 제례를 위한 엄숙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정전은 감실을 마련하여 어진을 봉안하고 제례를 지내는 공간이다. 정전 내부에는 바닥전을 깔고 제상(祭床)을 비롯한 각종 산선(繖扇)과 청개(靑蓋), 홍개(紅蓋) 등의 의장물을 진열하였다. 감실은 ‘침실(寢室)’ 또는 ‘어방(御房)’으로도 불리는데 1칸을 앞뒤로 나누어 중앙에 어진을 봉안하고 뒷공간은 물품을 수장할 수 있도록 했다. 어진 뒤에는 오봉병이 있고 앞에는 비단으로 휘장을 쳤다. 상부는 보개천장을 꾸몄으며 천장 하부에는 용과 봉황, 학이 그려져 있다.
정전은 일반적인 묘(廟) 건축과 같이 삼면을 벽으로 축조하고 평상시 문을 닫아 놓기 때문에 습기로 인해 어진이 훼손될 우려가 많았다. 초창기 경기전 정전에서는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숯을 화로에 피워 건물 내부에 나누어 놓았었다. 이후 1439년(세종 21)에는 정전 침실 바닥에 온돌을 놓고 북쪽에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아궁이에는 직접 불을 때지 않고 밖에서 숯을 피워 연기가 나지 않을 때 아궁이에 넣어 화재와 그을림을 예방하였다.
그러나 직접 불을 때지 않는 방법으로는 습기 제거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경기전은 1872년(고종 9)에 어진을 새롭게 모사해 모시면서 침실의 바닥을 온돌에서 마루로 고쳤다. 경기전과 준원전의 온돌을 영희전과 같이 마루로 바꾸라는 고종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전 앞에 덧대어 있는 1칸의 첨각(정자각)은 의례시 제사에 바칠 술을 따르는 준소(樽所)가 설치되며 집례자가 서 있는 곳으로 활용된다. 종묘 등에서는 전면 퇴칸이 준소로 활용되지만 경기전 정전은 전퇴가 없으므로 비올 때를 대비하여 설치한 것으로 보여진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진전도’의 정전의 모습은 정자각의 형태가 아닌 일(一)자집의 모습이다.
경기전 정전의 건축형식은 정전과 익랑, 월랑으로 구성되어 있고, 외신문, 내신문, 정전으로 이어지는 정전 일곽의 배치형식이 『국조오례의』의 ‘진전도’와 일치하고 있어 조선 초기의 진전제도를 잘 따르고 있다. 다만 정전의 모습이 능침의 침전처럼 정자각 형식이어서 진전도와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태조진전인 준원전과 목청전의 정전 모습도 경기전과 같은 형식이어서 후대에 이와 같은 정자각 형식의 정전이 일반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전 정전은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어진을 봉안한 진전건물이라는 기능과 그에 걸맞는 엄격한 격식과 품위를 갖추고 있다. 중건 후 여러 차례의 수리 등이 있었으나 공포의 세부적 수법과 구조는 17세기 초 중건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특히 외신문, 내신문, 정전으로 이어지는 배치형식과 정전과 익랑, 월랑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구성은 『국조오례의』의 ‘진전도’와 일치하고 있어 조선 초 태조진전의 건축적 구성을 볼 수 있다. 또한 진전도와 비교해 볼 때 정전의 형식이 전면에 첨각이 부설되어 정자각 형태로 변화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