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난은 조선 후기 통정대부·가선대부 등의 공명첩을 받은 조각 승려이다. 1640년경에 태어나 1730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1680년부터 불상 제작에서 화승 집단을 이끄는 수화승으로 활동했다. 고흥의 팔영산 능가사에 거주하면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사찰 불상들을 제작했다. 색난이 만든 불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화순 영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등이다. 그는 1685년 고흥 능가사 응진전 불상을 제작할 때 통정대부의 공명첩을 받았다. 색난의 계보는 하천 등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전라남도 고흥군 점안면 팔영산 능가사에 거주하면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사찰에 목조삼존불좌상과 나한상,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을 제작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공명첩을 받았다. 그의 계보는 일기, 하천 등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 가장 중요한 조각승 계보를 이루고 있다.
색난은 생몰년이나 조각승(彫刻僧)이 된 배경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과 사적기 등의 문헌기록을 통하여 활동 시기와 지역, 불상 양식, 조각승의 계보를 밝힐 수 있다.
색난이 만든 불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1680년에 전라남도 화순 영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광주 덕림사 봉안)이다. 그는 이 불상을 만들 때 수화승(首畵僧)이었으므로 최소한 1670년대부터 불상 제작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684년에 전라남도 강진 정수사 나한전과 1685년에 전라남도 고흥 능가사 응진전 목조석가삼존상과 나한상 등을 조성하였는데, 특히 능가사 응진전 불상을 제작할 때 ‘가섭대시주(迦葉大施主) 통정겸금어색난(通政兼金魚色難)’으로 언급되어 불상 제작에 시주자로 참여하고, 정삼품(正三品) 문관의 품계에 해당하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공명첩(空名帖)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678년에 경상남도 김해 은하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을, 1689년에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과 서울 한국불교박물관에 소장된 목조불감을 만들었다.
색난은 1693년에 전라남도 구례 천은사 응진전 목조석가삼존상과 나한상을, 1694년에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극락보전 불상을 제작하고, 1698년에 고흥 능가사 범종 주조에 시주자로 참여하면서 전라남도 해남 성도암 목조보살좌상(제주도 관음사 봉안)을 개금하였다. 또한 그는 1700년에 해남 성도암에 나한상을, 1703년에 구례 화엄사 각황전 불상 가운데 석가모니(釋迦牟尼)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을, 1707년에 고흥 능가사 불상을 만들면서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간행에 대시주자로 참여하고, 1709년에 고흥 금탑사 보살좌상(고흥 송광암 봉안)과 목조삼존불좌상(광주 덕림사에 봉안되었다가 1980년에 화재로 소실)을 조성하였다. 그는 1711년에 고흥 능가사 대웅전 기와(瓦)와 1730년에 전라남도 곡성 관음사 대은암 범종(곡성 서산사 소장) 제작에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색난은 1703년에 만든 구례 화엄사 각황전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팔영산사문(八影山沙門)으로 언급되어 고흥 능가사에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750년에 건립된 고흥 능가사사적비(楞伽寺事蹟碑) 후면에 가선(嘉善) 색난으로 언급되어 1709년 이후에 종이품(從二品) 문무관의 품계에 해당하는 공명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발원문과 사적기 등을 중심으로 색난을 생애를 살펴보면, 색난은 1640년을 전후하여 태어나서 1660년대 불상 제작의 수련기와 보조화승으로 거친 후, 1680년부터 불상 제작의 수화승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화순 영봉사, 고흥 능가사, 강진 정수사, 김해 은하사, 구례 천은사, 화순 쌍봉사, 해남 성도암과 대흥사, 구례 화엄사, 영암 도갑사, 하동 쌍계사, 고흥 금탑사 등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많은 사찰에 불상을 제작하였고, 1698년에 고흥 능가사 범종, 1707년에 『선문염송설화』 간행, 1711년에 고흥 능가사 대웅전 기와, 1730년에 곡성 관음사 대은암 범종 제작에 시주자로 참여하여 사찰 불사에 경제적으로 많은 후원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각승 색난의 계보는 색난(色難, 色蘭, 1680∼1730: 조각승 활동 시기, 이하 조각승들도 활동시기 명시함) → 충옥(忠玉, 沖玉, 1668∼1703), 초변(楚卞, 1680∼1706), 일기(一機, 1698∼1720) → 하천(夏天, 1703∼1730), 석준(碩俊, 1706∼1727), 종혜(宗惠, 1724∼1730)로 이어진다. 색난은 고흥 능가사에 거주하였기에 조계산을 위주로 활동한 부휴문도(浮休門徒)에 속하는 스님이다.
색난이 만든 불상의 양식은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이 가슴까지 완만하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세 겹으로 접힌 주름이 단(段)을 이루면서 비스듬히 늘어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이 결가부좌한 양다리 밑으로 늘어져 완만한 곡선으로 펼쳐지고 그 뒤로 세 가닥의 옷 주름선이 규칙적으로 흘러내린다. 소매 자락은 왼쪽 무릎을 완전히 덮어 연판형(蓮瓣形)으로 처리되고, 대의(大衣)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가슴까지 올려 묶어 상단(上段)이 연판형을 이룬다. 색난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 만든 불상 양식은 18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세부 표현이 생략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색난은 1685년에 고흥 능가사 응진전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1750년에 건립된 능가사 사적비 뒷면 시주질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언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