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관음도 ()

수월관음보살도
수월관음보살도
회화
개념
중국에서 당송 시대 이후 형성된 33변화관음 중 하나인 수월관음의 모습을 도상화한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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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국에서 당송 시대 이후 형성된 33변화관음 중 하나인 수월관음의 모습을 도상화한 불화.
개설

일반적으로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의 연못가 바위 위에 앉아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는 관음보살도의 모습을 기본 구성으로 한다. 중국 당말(唐末) 오대(五代) 돈황(敦煌)에서 제작된 수월관음도들이 현존하는 수월관음도 중 가장 이른 작품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제작된 관세음보살화 대부분이 수월관음도에 속한다.

연원 및 변천, 내용

중국에서 수월관음도의 성립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기록에 의거하여 8세기 중후반 활동한 당대(唐代)의 궁정화가 주방(周昉)이 창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돈황이 티베트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중원에서 활동한 주방의 수월관음도가 돈황에 전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존하는 돈황 수월관음도는 제작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들이며, ‘수월관음보살(水月觀音菩薩)’명(銘)과 기년명(紀年銘)이 있는 세 작품이 남아있다. 이 세 점의 돈황본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와 도상에 있어 연관성이 많은데 이러한 도상의 기원에는 9세기 중엽에 중국에서 개창된 관음 성지인 보타산(普陀山) 관음 성지와 관련이 있다. 성지가 개창된 후 보타산에 거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관음을 찬송하는 게송이 만들어지고 관음경전의 위경(僞經)인 『고왕경(高王經)』이 첨부되는데, 이 『고왕경』 게송과 관련된 ‘보타산관음도(普陀山觀音圖)’ 도상이 불화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대나무가 세 그루가 표현되는 도상은 대표적인 것으로 이후 전개되는 송원대(宋元代) 수월관음도에서도 계속 볼 수가 있다. 돈황의 수월관음도에서 살펴 볼 수 있는 수월관음신앙은 망자 추복, 안산(安産), 해난구제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후 송원대(宋元代) 수월관음도 전개에서는 북송말 백묘화(白描畫)로 유명한 이공린(李公麟)이 그린 관음화의 형상이 수월관음도의 도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가 있다. 또한 『화엄경』과 관련하여 53(55)선지식역참(善知識歷參) 도해 역시 수월관음 도상 확산에 기여하였다. 보타낙산(보타산) 관음 묘사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보타산 관음을 친견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편 관세음보살은 바닷가 동굴 같은 곳에 윤왕좌(輪王坐)의 자세로 앉아 있고 암좌에는 풀이 깔려 있으며, 버드나무가지는 정병에 꽃혀 있고 관음보살의 건너편 아래쪽으로 선재동자가 배례하고 있다. 이러한 도상들은 고려 수월관음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보타산 관음성지가 개창된 이후 ‘보타산관음도’가 유입되면서 동해안 낙산(洛山)에 관음성지가 정해지고 낙산사(洛山寺) 창건 설화가 만들어진다. 낙산 설화에서는 두 그루의 대나무가 등장하는데, 이는 세 그루의 대나무를 표현한 중국 수월관음도와 고려 수월관음도를 구별하는데 가장 큰 도상적 특징이다.

고려의 낙산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권3 탑상(塔像) 제4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조(調信條)에서 전거한 의상대사(義相大師)와 관련된 내용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낙산’이라고 명명된 시기와 의상대사 활동시기와는 실제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의상과 관련된 낙산 설화는 후대에 가탁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낙산 설화의 성립은 대략 10세기 초엽 경까지 이루어졌을 것이며, 이것은 현존하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제작 시원을 시사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월관음’ 이라는 명칭은 관음보살이 물에 비친 달을 보며 금강보석 위에 앉아 있으면서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화엄경』「입법계품」 의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화엄경』80권본에 ‘수월중(水月中)’이라는 표현에서 근거하여 맑은 물이 있으면 달은 언제나 나타난다는 평등한 법성(法性)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물에 비친 달의 실체는 없다는 평등한 공(空)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보았다.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도상적 특징은 관음이 앉아 있는 암좌의 풀방석, 선재동자의 좌법 등으로 지적되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도상의 전거는 화엄경의 한역본 가운데 하나인 『40화엄경(華嚴經)』에서 근거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특징 외에 관음보살이 들고 있는 염주 등은 당시 송대(宋代) 불화가 서하(西夏)와 고려에 파급되면서 서하불화와의 유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월관음도는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관음신앙은 시대를 넘나들며 지속적으로 유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고려 수월관음도의 측면향의 반가좌한 형태가 정면향의 윤왕좌(輪王坐)로 바뀌게 되고, 두 그루였던 대나무는 세 그루로 변화하는 등 도상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조선후기에는 수월관음의 특유 착의였던 투명 베일이 흰색인 백의로 바뀌면서, 후불벽 뒤에 벽화로서 조성되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수월관음도는 종래의 존상화적인 이미지의 관세음보살상은 퇴색되어져 가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배경에는 선행하는 불화 도상의 수용과 더불어 민간에 유통되었던 관음화보가 영향을 주었다.

현황

현재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국내를 비롯한 일본, 미국, 유럽등에 40여점이 현존하고 있다. 특히 다수의 수월관음도가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데, 단독 도상으로서는 고려불화 150여점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어, 관음신앙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전기 후기를 막론하고 다수의 수월관음도가 제작되는데 전기의 예는 대다수 일본에 유존되고 후기는 사찰에 관음전, 원통전이 조성되면서 그 후불화로서 봉안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수월관음도 중에 고려시대 제작된 수월관음도는 그 제작기법, 재료 등에 있어 복채법, 금니의 사용으로 화려함을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고, 다수의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융성했던 관음신앙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조성된 수월관음도와 그 도상의 변모를 통해 시대를 넘어선 관음신앙의 성행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찬란한 불교미술의 세계, 불화』(김정희, 돌베개, 2009)
『고려시대의 불화』(시공사, 1996)
『고려불화-한국의 미 7』(문명대, 중앙일보사, 1981)
「낙산설화와 고려수월관음도, 보타산관음도장」(황금순, 『불교학연구』18, 불교학연구회, 2007)
「고려 수월관음도에 보이는 〈40화엄경〉의 영향」(황금순, 『미술사연구』17, 미술사연구회, 2003)
「이학소장 수월관음도의 표현과 기법」(정우택, 『단호문화연구』창간호, 1996)
「고려 수월관음 도상의 연원에 대한 재검토」(강희정, 『미술사연구』8, 미술사연구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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