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전주에서 소치(小癡)허련(許鍊)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867년 진도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허련은 큰아들 허은(許溵)이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화업(畵業)을 이을 것으로 여겨 북송의 서화가 미불(米芾)의 성을 따서 미산(米山)이라 호를 지어 주는 등 크게 기대하였다. 그러나 허은이 1867년 34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낙담하여 다른 자식들에게는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허형의 나이 16세 경, 우연히 아들이 그림에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허련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가르쳐 허형에게 가업을 잇게 하였다. 그러면서 형인 허은에게 주었던 미산이라는 아호를 허형이 쓰게 하였기 때문에, 허은을 큰 미산(大米, 伯米), 허형을 작은 미산(小米, 季米)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 허련에게 간헐적으로 그림지도를 받으며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허형의 생애는 거주지의 이동에 따라 대략 3기로 구분된다. 태어나서 줄곧 살았던 진도를 떠나 1912년 강진 병영(兵營)으로 이사하였고, 1921년에 다시 목포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거주지의 이동은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전남지방의 상업과 교역지의 이동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허형은 1923년에 개최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허준(許準)이라는 이름으로 「하경산수(夏景山水)」를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1928년 6월 광주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허형은 8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허련의 화법을 본받은 산수화 · 사군자 · 괴석 등을 수묵 또는 수묵담채로 그렸다.
허형의 작품세계는 진도에서의 활동시기를 전기로, 강진 병영시기와 목포시기를 후기로 나누기도 하지만 작품상 전후기 구분이 뚜렷치 않다. 허형의 회화사적 의의는 본인의 작품 활동보다는 근현대 호남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아들 허건과 허림(許林), 그리고 일가인 허백련에게 그림을 지도해 그들이 호남화단과 근현대 한국화단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도록 일조했다는 데 있다.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1923년)
개인전(1928년, 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