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주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항저우〔杭州〕로 피난하였고, 이후 창사〔長沙〕, 구이린〔桂林〕, 하노이〔河內, 베트남〕, 쿤밍〔昆明〕을 전전하였다. 1939년 2월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참여하여 항일연극과 강연, 합창, 그리고 전단을 배포하는 등 반일 사상을 고취하고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류저우 각계의 지지와 중국 항전 예술단체의 협조 속에 삼일절 기념공연과 중국 부상병을 위한 위로금 모금공연 등을 전개하였다. 청년공작대의 항일공연예술 활동은 중국 측에 한‧중 연대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인식하게 하였고, 한국 고유의 정서와 특색을 담긴 공연을 선보여 중국인 관객들 앞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드러내 보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개최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 참석하여 헌기(獻旗)하였다. 1942년 1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경무원(警務員) 겸 재무원(財務員) 부원으로 선임되어 1943년 3월 30일까지 활동하였다. 1943년 3월 강홍주(姜弘周)‧ 김석동(金奭東)‧남상규(南相奎)‧ 민영숙(閔泳淑)‧윤신민(尹信民)‧ 이범석(李範錫)‧최용덕(崔用德)‧황애숙(黃愛淑)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입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5월 9일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창당된 정당으로, 통합 과정부터 건군 문제를 검토하고 계획하여 광복군 편성을 한국독립당이 추진해 나갈 당면 목표의 하나로 결정하였다. 1943년 3월 민영주는 한국독립당의 5개 구(區) 중 14명으로 구성된 제5구에 속하였는데, 매주 일요일 10시에 주회(周回)를 하였다.
1944년 7월 4일 임시정부 비서처 서기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16일까지 활동하였고, 1945년 1월 9일 임시정부 주석판공실 서기로 임명되어 그해 3월 19일까지 활동하였다.
1945년 초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설치된 심리작전연구실에서 김정숙(金貞淑)‧ 신순호(申順浩)‧ 지복영(池福榮) 등과 방송을 통한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방송을 통한 선전 활동은 임시정부 선전부가 중국 국민당 선전부 대적선전위원회와 합작하여 1944년 2월부터 한국어 방송을 실시하게 하자 한국광복군에서도 이를 이용하여 전개하였다.
1945년 4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었고, 제2지대장실에 근무하던 중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던 김준엽(金俊燁)을 만나 1945년 6월 29일 시안〔西安〕 두곡(杜曲)에서 결혼하였다. 1945년 11월 1일 박찬익(朴贊翊)을 단장으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의 총무과장으로 한인들에 대한 조사, 구호, 재산 처리, 귀환 업무 등의 활동을 펼치고 귀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