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호는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1939년 2월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중 합동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참가하여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 참석하였으며,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를 거쳐 1945년 초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심리작전연구실에서 방송을 통한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순호는 1926년 3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1939년 2월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線靑年工作隊)에 참여하여 항일연극과 강연, 합창, 그리고 전단을 배포하는 등 반일 사상을 고취하고,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류저우 각계의 지지와 중국 항전 예술단체의 협조 아래 3 · 1절 기념공연과 중국 부상병을 위한 위로금 모금공연 등을 하였다. 청년공작대의 항일 공연예술 활동은 중국 측에 한 · 중 연대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인식하게 하였고, 한국 고유의 정서와 특색을 담긴 공연을 선보여 중국인 관객들 앞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드러내 보였다. 또한, 향후 중국 측과의 우호관계 형성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9년 5월 신순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쓰촨성〔四川省〕 기강(綦江)에 도착하여 머물렀는데, 남자 67명, 여자는 신순호를 포함하여 40명 등 총 107명이었다. 기강현 정부에서는 한교등기잠행판법(韓僑登記暫行辦法)을 제정하여 한인(韓人)들에게 거주 신청서를 작성 제출하게 하였고, 등록증을 발급하였다.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은 대부분 상승가(上昇街) 진가공관(陳家公館)에 머물렀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남자 대원들은 기강현의 산 위에 있는 관음암(觀音庵)에 거처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개최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 참석하였고, 1942년 9월에는 임시정부 생계위원회(生計委員會) 회계부에 파견되어 근무하였다. 1943년 12월 12일 충칭의 임시정부 강당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박영준(朴英俊)과 결혼하였다.
1944년 3월 15일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5월 9일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되어 창당한 정당이다.
1945년 1월 8일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 과원으로 임명되었고, 1945년 초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설치된 심리작전연구실에서 김정숙(金貞淑) · 민영주(閔泳珠) · 지복영(池福榮) 등과 방송을 통한 선전 활동을 펼쳤다. 방송을 통한 선전 활동은 임시정부 선전부가 중국 국민당 선전부 대적선전위원회와 합작하여 1944년 2월부터 한국어 방송을 실시하자 한국광복군에서도 이를 이용하여 전개하였다.
부모와 시부, 남편과 함께 한인 동포의 귀국 업무를 담당하다가 1948년 4월에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