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지(苔紙)는 닥나무 등의 장섬유와 파란색을 띤 수태(水苔)를 섞어 만든 종이이다. 태지의 제조법에 관해서는 1541년(중종 36)에 병조판서로 있던 김안국(金安國)이 중종에게 태지 5속(束)을 진상한 자세한 내용이 있다( 『중종실록』 권95, 중종 36년 6월 25일). 이에 따르면, 김안국이 고서(古書)를 살펴보다 수태로 종이를 만든다는 말이 있어 시험 삼아 만들어 보았다고 한다. 닥나무에 수태를 섞어 만드는 것인데, 수태가 어린 것은 조금 더 많이 넣어 닥나무와 섞고, 수태가 노성한 것은 매우 적게 넣어 닥나무와 섞어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중종은 태지를 서울과 지방에 보급할 목적으로 김안국이 진상한 태지를 조지서(造紙署)에 보내 태지의 견본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태지는 김안국이 진상하기 이전부터 개발되어 사용되었지만, 김안국이 진상한 1541년 이후로 태지가 보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태지는 일반 닥나무 종이의 제조 과정과 유사하다. 지통에 황촉규를 넣은 물을 넣고 닥섬유를 골고루 푼 다음 깨끗이 씻은 수태를 넣어 종이를 떴다. 이때 닥나무 등의 장섬유가 주원료이고, 수태는 종이의 표면에 아름다운 문양을 드러내기 위해 넣는 부수적인 첨가 재료이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태지 실물은 간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푸른색의 가는 수태가 종이의 표면에 펼쳐져 문양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간찰의 문양지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태지는 태지의 품격을 드러낼 수 있는 용도로 시전지, 시문지, 서화지, 혼서지 등에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에는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실린 해초(海草)를 설명한 글이 있다. 그중 “수태가 있는데 색깔은 녹색으로, 곧 측리지(側理紙)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수태는 곧 해태(海苔)를 뜻하는 말로, 측리지는 그 결이 종횡으로 비스듬하다고 해서 붙여진 태지의 또 다른 명칭이다. 이 내용 뒤로는 송대 약물학자 구종석(寇宗奭)의 말을 인용하여 수태를 태포(苔脯)라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파래[叵羅]라고 불렀다고 하여 태지의 재료가 파래였음을 설명한 내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