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편은 1860년경 정약용의 제자 이청이 저술한 천문학서이다. 『동국문헌비고』 「상위고」(1770년)와 『국조역상고』(1796년) 등 조선의 관찬 천문학서는 물론이고, 『신법산서』(1645년)와 『역상고성』(1723년) 등 중국에서 편찬된 거질의 관찬 천문학서에 담긴 천문학 지식 정보들을 인용 발췌하며 정리한 대작이다. 특히 조선의 학인들 사이에서는 별로 유통되지 않았던 17세기 중국의 방이지(方以智) 학파의 천문학 지식 정보를 담은 『물리소지』와 『고금석의』(1682년 간행)를 활용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8권 3책 분량의 필사본(筆寫本)으로, 유일본(唯一本)이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강진 유배 시절 정약용의 수많은 저술 활동을 수제자로서 손발이 되어 도왔던 이청은 정약용으로부터 큰 지적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천문학(天文學)에는 비교적 해박하지 못하였던 정약용이었기에 그로부터 전문적인 천문학 관련 학습을 받지는 못하였다.
정약용이 강진을 떠난 후 이청은 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어렵게 서울 생활을 하면서 천문학 정보를 습득하고 공부하였던 것 같다. 특히 달성서씨(達城徐氏) 서명응(徐命膺), 서호수(徐浩修), 서유구(徐有榘)로 이어지는 자타가 인정하는 조선 최고의 사대부 천문학자 집안의 서자인 서팔보(徐八輔)와 교류를 맺으며, 천문학 전문가들도 접근하기 어려운 중국과 조선의 고금(古今)의 천문학 관련 문헌들을 섭렵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정관편(井觀編)』이라는 조선에서는 보기 어려운 대작(大作)을 혼자의 힘으로 저술할 수 있었다.
『정관편』은 천문학 분야의 거의 모든 주제들을 총 38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8권 3책으로 담았다. 각 주제별로 고금의 문헌에 나오는 관련 내용을 발췌 정리한 후, 자신의 견해를 중간에 첨가해 넣거나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적어 넣는 식으로 서술되었다. 따라서 천문학 분야의 최신 지식 정보가 잘 정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논쟁거리였던 주제들에 대해서 이청 자신의 개인적 견해가 잘 드러나 더욱 주목할 만한 천문학서라 할 수 있다.
이청은 조선의 문헌으로는 세종대의 『천문유초(天文類抄)』, 영조대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1770년), 그리고 정조대의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1796년) 등 관찬 천문학서에서 중요한 천문학 관련 고사와 이론, 그리고 데이터 등을 발췌해서 정리해 놓았다. 중국 문헌으로는 『속통지(續通志)』(1785년)와 『수도제강(水道提綱)』(1776년)에 수록된 천문 데이터들을 찾아내 소개하고 있다. 17세기 이후 전래된 한역(漢譯) 서양과학서들인 『건곤체의(乾坤體義)』(1605년),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1607년), 『천문략(天文略)』(1615년), 『주제군징(主制群徵)』(1629년), 『공제격치(空際格致)』(1633년), 그리고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지동설(地動說)을 소개하고 있는 『지구도설(地球圖說)』(1767년 간행) 등도 참고하였다. 나아가 중국 황제의 명으로 편찬된 방대한 분량의 관찬 천문학서들인 『신법산서(新法算書)』(1645년), 『영대의상지(靈臺儀象志)』(1674년), 매문정(梅文鼎, 16331721)의 『역학의문(曆學疑問)』(1693년)과 『규일후성기요(揆日候星紀要)』, 매각성(梅瑴成)의 『역상고성(曆象考成)』(1723년), 대진현(戴震賢, Kögler)의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1742년)과 『흠정의상고성(欽定儀象考成)』(17441752년) 등이 총 망라되었다.
이외에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방이지(方以智)의 『물리소지(物理少識)』와 『통아(通雅)』, 그의 아들 방중리(方中履)의 『고금석의(古今釋疑)』(1682년 간행)를 인용 소개할 뿐만 아니라, 그들 과학 이론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이청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헌들에 담긴 천문학 지식에 대한 논의는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이외에는 이청의 『정관편』이 유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