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주군(咸州郡)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당시 방리는 주남사(州南社) 등 27사에 호수 1만1708호, 인구 5만9159명(남자 3만3956명, 여자 2만5203명)이고, 전결은 한전(旱田)이 5,913결 50부 8속, 수전이 1,295결 95부 2속이었다. 부치(府治)는 주남사에 있었다. 1862년(철종 13)에는 함흥민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앞서 일어난 진주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일어난 것으로, 주모자 이면용(李冕用)은 사형당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지방관제가 개정되어 전국에 23부 337군을 설치하고 부에는 관찰사, 군에는 군수를 두었을 때 함흥부에도 관찰사를 두었고, 그 아래 11개 군이 예속되어 있었다. 이듬해 8월 다시 전국을 13도 1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함흥부는 함경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으며, 1910년에는 함흥군으로 고쳐졌다. 19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