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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梵日)

불교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를 개창한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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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통효대사(通曉大師)
분야
불교
유형
인물
성격
승려
성별
출생일
810년
사망일
889년
시대
고대-남북국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를 개창한 승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선승(禪僧).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闍堀山派)의 개창조이다. 성은 김씨. 계림 출신.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명주도독을 지낸 김술원(金述元)이며(『조당집(祖堂集)』에는 김술원이 범일의 할아버지로 기록되어 있음), 어머니는 문씨이다.
태양을 머리 위로 받드는 태몽을 꾸고 13개월 만에 태어났으며, 15세에 출가하였고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831년(흥덕왕 6)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순방하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성불(成佛)하는 법을 물었다. 제안이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 범일은 대오(大悟)하였다. 그 뒤, 제안의 문하에서 6년 동안 머물다가 유엄(惟儼)을 찾아가 선문답(禪問答)을 나누고 크게 인가를 받았다.
844년(문성왕 6)에 무종이 불교를 박해하는 법난(法難)이 일어나자 상산(商山)의 산 속에 숨어서 반년 가량 지내다 소주(韶州)에서 6조 혜능(慧能)의 탑에 참배하였고 847년 귀국하였다.
그 뒤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무르며 정진하다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崛山寺)로 옮겨 40여 년 동안 후학들을 교화하였다. 그 때 경문왕·헌강왕·정강왕이 차례로 국사(國師)로 받들어 계림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수도자의 본분에 대해서는 “부처의 뒤를 따르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깨달음도 따르지 말라. 앞뒤 사람을 바라보고 돌아볼 것도 더 이상 닦고 얻을 바도 없는 본래 부처로서의 철두철미한 자기 본분의 자각을 수행의 목표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임종 직전에 “내 이제 영결하고자 하니 세속의 부질없는 정분으로 어지러이 상심하지 말 것이며, 모름지기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 큰 뜻을 깨뜨리지 말라”고 당부한 뒤 입적(入寂)하였다.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이며, 탑호는 연휘(延徽)이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행적(行寂)과 개청(開淸)이 있다.
그가 독특하게 주창한 것으로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있다. 진귀조사설은 진성여왕이 불교의 선(禪)과 교(敎)의 뜻을 물은 데 대한 대답이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 곧바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오로지 존귀한 것은 자아(自我)뿐이라고 하였으며, 뒷날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수행하다가 새벽 샛별을 보고 진리를 깨달았으나 궁극의 경지가 아님을 느꼈다.
그 뒤, 진귀조사를 만나 교 밖에 따로이 전하는 선지(禪旨)를 얻고 대오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무염(無染)이 『능가경(楞伽經)』을 배우다 조사의 길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버리고 당나라로 가서 선법을 익힌 것이나, 도윤(道允)이 『화엄경』을 읽다가 심인(心印)의 법과 같지 않다 하고 당나라로 가서 선을 공부한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석가모니가 샛별을 보고 도를 깨우친 뒤 진귀조사에게서 선을 배웠다는 것은 불교의 정설에는 없는 것이며,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達磨)의 밀록(密錄)에만 있는 것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에 대한 구별이 범일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만은 주목되는 일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김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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