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 ()

불교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를 개창한 승려.
이칭
시호
통효대사(通曉大師)
법명
품일(品日)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810년(헌덕왕 16)
사망 연도
889년(진성여왕 3)
출생지
강원도 강릉시
내용 요약

범일(梵日, 810~889)은 통일신라시대 선종 승려로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산조이다. 9세기 전반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을 배우고 귀국하여 명주(현재 강원도 강릉) 굴산사(崛山寺)에 머물렀다. 범일을 개산조로 하는 사굴산문은 고려 말까지 선을 주도하는 산문으로 성장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를 개창한 승려.
주요 활동

범일은 824년(헌덕왕 16)에 머리를 깎고 수행을 하다가 829년(흥덕왕 4) 20세에 경주로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후 경주에서 활동하던 범일은 태화 연간(827~835)에 당나라로 가던 신라 왕자와 함께 뱃길로 당으로 갔다. 이때 입당사(入唐使)였던 신라 왕자는 김의종(金義琮)으로 보기도 하고 김능유(金能儒)로 보기도 한다. 당으로 간 범일은 중국에 머물며 염관 제안(鹽官齊安)의 문하에서 6년 동안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837년(희강왕 2)에는 약산 유엄(藥山惟儼)에게로 가 8년 동안 을 배우고 주1를 받았다. 844년 당 무종(武宗)의 회창폐불(會昌廢佛)로 상산(商山)의 산에서 반년 가량을 숨어 지내다가 소주(韶州)에서 6조 주2의 탑에 참배하였고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범일은 3년 정도 경주에 머물며 문성왕의 주3를 받았다. 이후 경주를 떠나 백달산(白達山)에서 정진하던 중 851년(문성왕 13) 명주 도독 김공(金公)의 청으로 명주 굴산사(崛山寺)주11하며 산문을 개창하였다.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차례로 범일을 국사(國師)로 받들며 경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그는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낙산사(洛山寺)에 전각을 짓고 돌로 만든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주4하기도 하였다. 범일은 굴산사에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경보(慶甫)가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전 굴산사로 범일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범일은 개청(開淸), 행적(行寂), 신의(信義) 등 ‘십성제자(十聖弟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범일은 굴산사에 주석한 뒤 889년(진성여왕 3) 입적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신라 왕실 및 경주의 귀족들과는 거리를 두었고, 주5주6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범일과 주7의 영향력은 명주뿐만 아니라 강원도 일대로까지 확산되었다.

고려 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는 범일이 선(禪)과 교(敎)의 뜻을 물은 진성여왕에게 대답하였다고 하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수록되어 있다. 진귀조사설은 주8가 샛별을 보고 도를 깨우친 뒤 진귀조사에게서 선을 배웠다는 내용인데, 이는 신라 특유의 선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교에 대한 선의 우위를 주장하는 진귀조사설이 범일의 사상인지 혹은 후대에 범일에게 주10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상훈과 추모

범일은 입적 후 통효대사라는 시호와 연휘지탑(延徽之塔)이라는 탑명을 받았으며, 왕명으로 굴산사에 비석과 승탑이 세워졌다. 따라서 현재의 굴산사지에 있는 승탑을 범일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당시의 비석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굴산사지에서 비석의 비편이 발견되었다. 또한 신라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박인범(朴仁範)이 지은 「범일국사영찬(梵日國師影讚)」이 전하고 있어 범일이 입적한 후 그의 주9을 굴산사에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다. 범일과 동시대를 살았던 최치원이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 '덕이 두터워 중생들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도가 높아 왕의 스승이 될 만한' 선승들을 꼽으며 여기에 범일을 넣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 말 범일은 신라 사회에서 명성 높은 선승이었다.

범일이 입적한 이후 민간에서는 범일과 관련된 설화가 등장하였다. 특히 신비롭게 윤색된 범일의 탄생과 활동이 전승되면서 범일은 신승(神僧)으로 인식되었다. 18세기 후반이 지나면서 범일은 신으로 추숭되어 강릉 성황사에 그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범일에 대한 추숭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대관령 산신을 맞이하는 강릉단오제에서 그는 대관령국사성황신(大關嶺國師城隍神)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이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三國遺事)』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천책)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조당집(祖堂集)』
이능화, 『조선불교통사』(신문관, 1918)

단행본

논문

김동화, 「신라시대의 불교사상」(『아세아연구』 10, 1962)
신천식, 「한국불교사상에서 본 범일의 위치와 굴산사의 역사성 검토」(『영동문화』 창간호, 1980)
심형준, 「강릉단오제 主神교체 문제에 관한 고찰」(『역사민속학』 43, 2013)
박도식, 「강릉단오제 主神 교체의 시기와 역사적 배경」(『지방사와 지방문화』 22, 2019)
정동락, 「崛山門 梵日國師 관련 자료의 검토」(『한국고대사탐구』 33, 2019)
조영록, 「崛山祖師 梵日 新傳」(『한국사상사학보』 33, 2016)
채미하, 「조선시대 강릉의 성황사(城隍祠)와 단오제」(『한성사학』 29, 2014)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주석
주1

사승(師僧)이 제자의 득법(得法) 또는 설법을 증명하고 인가함. 우리말샘

주2

중국 당나라의 승려(638~713). 속성은 노(盧). 시호는 대감 선사(大鑑禪士). 육조 대사(六祖大師)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제6조로서, 남선종(南禪宗)이라는 파를 형성하였으며, 그의 설법을 기록한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전한다. 우리말샘

주3

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우리말샘

주4

신주(神主)나 화상(畫像)을 받들어 모심. 우리말샘

주5

교법(敎法)의 계통을 전하여 줌. 우리말샘

주6

이름난 학자 밑에서 배우는 제자. 우리말샘

주7

신라 때, 선종 구산문의 하나. 문성왕 때에 범일 국사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굴산사를 세우고 개산(開山)하였다. 우리말샘

주8

불교의 개조. 과거칠불의 일곱째 부처로,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이다. 기원전 624년에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바스투성에서 슈도다나와 마야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9세 때에 출가하여 35세에 득도하였다. 그 후 녹야원에서 다섯 수행자를 교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성립하였다. 45년 동안 인도 각지를 다니며 포교하다가 80세에 입적하였다. 우리말샘

주9

주로 얼굴을 그린 화상(畫像). 또는 얼굴을 찍은 사진. 우리말샘

주10

거짓 핑계를 댐. 우리말샘

주11

선종에서, 승려가 입산하여 안주함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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