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사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선승 체징이 창건한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에 있는 사찰이다. 체징은 가지산문의 제3조로, 보림사는 선문구산 중 가장 먼저 개산한 가지산문의 중심 사찰로 번성하였다. 외호문, 목조 사천왕상 등을 통해 조선 후기에도 대찰의 면모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6·25전쟁 때 외호문과 사천문만 남고 모든 전각들은 전소되었으며, 이후 중수·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불상과 탑의 건립 연대가 확실하여 9세기 후반 선종사 연구뿐 아니라 불교 미술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며 동양 3대 보림사 중 하나이다.
보림사는 원래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원표 대덕(元表大德)이 거처하던 곳이며, 759년(경덕왕 18)에 경덕왕은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우게 하였다. 이후 859년 헌안왕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이 이 절에 들어와 김언경 등의 도움으로 사찰을 장엄하였다. 861년에 사방에서 시주한 물자로 사찰을 넓히는 등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로 발전시켰다. 체징은 도의대사와 염거선사의 법맥을 이어 가지산문의 제3조가 되었다. 가지산문은 선문구산 중 가장 먼저 개산한 산문으로, 체징 사후 헌강왕은 사액(賜額)을 내려 보림사라 하였다. 가지산문과 체징을 중국의 보림사를 창건한 중국 불교 선종 제6조 혜능의 선맥을 잇는 존재로 인정한 것이다.
「장흥 보림사 중창기」는 1658년~1838년까지 180여 년간 보림사에서 있었던 불사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건물이 암자를 포함해 105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외호문 안쪽에 걸려 있는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 편액 끝에 1675년(효종 8)에 국가 수호 사찰의 제액을 내렸고 1726년(영조 2)에 시행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조선 후기까지 대사찰의 면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작성된 간단한 보림사 실측 도면에는 일주문, 천왕문, 대적광전, 대향각, 대웅전, 승실, 명부전, 응진당 등 8채의 건물이 보인다. 대부분의 건물은 6·25전쟁 때 불타 버리고 외호문(外護門)과 사천문(四天門)만 남았다고 한다. 불타 버린 대웅보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칸, 측면 3칸, 중층 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로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대웅보전은 1982년에서 1984년사이에 중건하였다. 대적광전은 1995년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하였고, 대웅보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과 대웅전 · 사천문 · 외호전 · 미타전 · 조사전 등이 있다. 이중 사천문 내부에는 1515년(중종 10)에 조성한 높이 3.7m의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 사천왕상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하며 조각 또한 뛰어나 1997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천왕의 몸속에는 보물로 지정된 『월인석보』, 『금강경삼가해』 등 총 227종 345권의 불교 관련 서적이 보관되어 있었다.
중요 문화유산으로는 국보로 지정된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이 있고, 보물로는 보림사 동승탑(寶林寺東僧塔), 보림사 서승탑(寶林寺西僧塔),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등이 있다.
870년(경문왕 10)에 건립된 남 · 북 삼층석탑은 대적광전 앞에 나란히 서 있는데, 대적광전이 동향(東向)이라 두 탑을 남 · 북 삼층석탑이라 한다.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광배와 대좌는 없고 불신만 남은 상태로, 불상의 왼팔 뒷면에 858년(현안왕 2) 김수종이 시주하여 만들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보림사는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산한 가지산문의 본사이자 도의-염거-체징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통해 선종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며, 사찰 내 불상과 탑은 9세기 후반 불교 미술 연구의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건립 연대가 명확하여 불교 조각 및 건축 등의 계보 연구에 기준이 된다. 또한 조선 후기 중수 기록들이 상세히 남아 있어 조선 후기 사찰 운영에 관한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