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1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러나 이이첨(李爾瞻) 등 권신들에게 아부하지 않아 한직에 머물렀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간으로 김신국(金藎國) · 조성(趙誠) · 박로(朴로) 등을 탄핵하고, 그 뒤 부응교로서 공서파(功西派)의 영수인 이조판서 김류(金瑬)가 북인 남이공(南以恭)을 대사헌으로 삼으려는 데 반대하다가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왕을 찾아가 사도시정(司䆃寺正)에 임명된 뒤, 후금(後金)과의 화의가 잘못되었음을 상소하였다. 1629년 박정(朴炡) · 나만갑(羅萬甲) 등과 노서(老西)로 지목되고 공서를 공격하다가 가평군수로 좌천되다.
이어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김류 · 윤방(尹昉) 등 대신들의 무능과 안일을 비난하다가 수원부사로 또 다시 좌천되었으며, 이어 1631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 이귀(李貴)가 박지계(朴知誡)를 지평으로 추천하자, 대사간으로서 참판 이성구(李聖求), 좌랑 구봉서(具鳳瑞)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다. 1634년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의 추숭 논의가 분분할 때 추숭에 적극 찬성해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이어 병조참지를 역임한 뒤 1636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 화의를 주장한 윤방 · 김류 등의 처형을 주장하다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된 뒤 대사성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어, 다시 윤방 · 김류 등의 전후 무사안일하고 반성하지 않는 행실과 김경징(金慶徵) · 이민구(李敏求)의 강도(江都) 방어 실패의 죄를 탄핵하였다.
그 뒤 대사헌이 되어 윤방이 종묘의 신주를 모독한 죄를 탄핵하고 자강책 10여 조목을 상소하였다. 성품이 강직해 여러 번 직언을 하다가 화를 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계속해 밀고 나가 충직함이 인정되어 그 때마다 복직되기도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취헌소차(翠軒疏箚)』 3권 3책이 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