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

윤치호(1865-1945)
윤치호(1865-1945)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좌옹(佐翁), 이토 지코(伊東致昊)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6년(고종 3) 12월 21일
사망 연도
1945년 12월 6일
본관
해평(海平)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
관련 사건
갑오개혁|독립협회|광무개혁|105인사건|흥업구락부
내용 요약

윤치호는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66년(고종 3)에 태어나 1945년에 사망했다. 조선 말기에 일본·미국 등에 유학했고 귀국 후 의정부 참의, 학부협판 등을 역임했다. 갑오개혁에 동참했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의 주역이었다. 부친이 사망하자 남작 작위를 이어받았고 105인 사건 주모자로 검거되었다가 일본천황의 특사로 풀려났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고 각종 시국강연에서 일제 찬양과 조선인 동원을 촉구했으며,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을 지냈다.

정의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66년 12월 21일 충청도 아산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호는 좌옹(佐翁)이다. 할아버지는 윤취동(尹取東)이며, 아버지는 서자로 대한제국기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尹雄烈)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다.

생애 및 활동사항

조선 말기에 일본 · 미국 등에 유학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의정부 참의, 학부협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제국기에는 독립협회 회장, 대성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작 작위를 습작하였으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장, 조선체육회 회장, 중추원 고문, 연희전문학교 교장,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6일 개성 자택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1869년부터 고향에서 글공부를 시작했다. 1873년 서울로 이주해 1878년까지 사숙에서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79년 어윤중(魚允中) 문하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여 1881년 4월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의 알선으로 4월 도쿄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여 게이오의숙에 입학한 유길준, 유정수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도쿄 유학생이 되었다.

1882년에는 도쿄대학 철학교수의 부인 밀레트(Millet, L. G.)와 도쿄대학 영어강사 간다 나이부[神田乃武]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체류 중 김옥균(金玉均) · 서광범(徐光範) ·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물과 일본 개화의 선구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등과 교유하였다. 1882년 말 김옥균의 권고에 따라 1883년 1월부터 귀국 전까지 3개월간 요코하마 주재 네덜란드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Leon. V. Polder)와 프랑스인 건축가 폴 사르다(Paul Sarda)에게 영어를 배웠다. 같은 해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조선에 부임하는 초대주한미국공사 푸트(Foote, L. 주1의 통역으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어 고종과 푸트 및 개화파 간의 교량 역할을 했다.

1884년 10월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로 승진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 박영효 등과 각별히 친밀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885년 1월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미국 총영사 스탈(Stahl, G.)의 알선으로 2월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여 1888년 8월까지 3년 6개월 동안 체계적인 근대교육을 받았다. 재학 중 이 학교의 선교교육자 알렌(Allen, A. J.) 학장과 본넬(Bonnel, W. B.) 교수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중서서원을 수료한 뒤 알렌과 본넬의 알선과 감리교회의 후원으로 1888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해 11월 테네시(Tennessee)주에 있는 밴더빌트(Vanderbilt)대학 신학과 영어 과정에 입학했다. 재학 중 틸레트(Tillet) 교수의 영향을 받았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1890년 졸업하였다. 졸업하던 해 조지아(Georgia)주에 있는 에모리(Emory)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 9월 졸업했다. 에모리대학 재학 중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수강했고, 캔들러(Candler, W. A.) 학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교내외 각종 행사와 집회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미국 유학을 마친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모교인 중서서원에서 1893년 11월부터 1895년 초까지 영어를 가르쳤다.

1895년 2월 귀국한 후 의정부 참의에 임명되어 갑오개혁에 동참했다. 그해 4월 내각 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5월 학부협판, 음력 윤5월 외부협판, 1896년 2월 학부협판을 거쳤다. 같은 해 4월에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Nicolai Ⅱ)의 대관식에 러시아특명전권대사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참석했다. 미국과 유럽을 거쳐 러시아에 갔다가 8월 상트 페테스부르크에서 민영환 일행과 헤어져 파리에서 3개월(8.21.∼11.18.), 상하이에서 6개월(1896.12.27.∼1897.6.12.)을 보내고 1897년 6월 18일 귀국하였다.

1897년 7월부터 독립협회에 가담해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운동을 이끌었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부회장에 선임되었고 3월 회장대리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독립신문』 사장과 주필을 맡았고, 7월 중추원 1등 의관(議官)이 되었으며, 8월 서재필이 추방당한 뒤 제2대 회장이 되었다. 독립협회 회장으로 이 해 10월 1만여 명이 참석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헌의육조(獻議六條)를 결의했다. 같은 달인 10월 중추원 부의장과 관민공동회 대회장을 맡았다.

정부의 탄압으로 1898년 12월 독립협회가 강제해산 당한 후 같은 달 한성부 판윤 겸 한성부재판소 수반판사에 임명되었다. 1899년 1월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로 전임되었고, 2월 원산항재판소 판사를 겸직했다. 1900년 6월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으로 전임되었고, 7월 삼화항재판소 판사를 겸했다. 1901년 7월 다시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 겸 원산항재판소 판사로 복귀했다. 1903년 1월 함흥안핵사, 7월 천안군수 겸 직산군수 겸 경부철도 검찰위원, 12월 무안감리 겸 무안항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다.

러일전쟁 발발 후 중앙관계에 다시 기용되어 1904년 3월 외부협판에 임명되었고, 8월 외부대신 서리를 겸하면서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을 맺었다. 1905년 5월 황성기독교청년회 이사를 맡았고, 9월부터 하와이와 멕시코 지역 한국인 이민실태를 조사하고 보호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미주 지역을 방문한 후 11월 6일 외교고문 스티븐스(D. W. 주2와 함께 귀국했다. 같은 해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외부협판을 사퇴했다.

1906년 4월 장지연(張志淵) · 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10월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하여 원장에 취임했으며, 12월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12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중추원 찬의로 재임했다. 1907년 4월 국채보상총합임시사무소(國債報償總合臨時事務所) 사무원으로 참여했으며, 1908년 3월 기호흥학회 교육부장, 5월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8년 9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도하는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09년 2월 안창호 등이 결성한 청년학우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장례식에 맞춰 장충단에서 개최한 관민추도회 준비위원을 맡았다. 1910년 1월 도미해서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감리교 평신도대회, 6월 스코틀랜드로 가서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12월 워싱톤 DC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고 귀국했다.

1911년 9월 아버지 윤웅렬이 사망하자 12월 남작 작위를 습작했다. 1912년 2월 일제가 날조한 이른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1913년 10월 징역 6년형이 확정됨에 따라 1913년 11월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 ‘일본천황’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출옥 이후 1916년 4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무에 선출되었다. 1916년 11월 대정(大正)친목회 평의원, 1917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사, 1918년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위촉되었다.

1919년 1월 최남선3 · 1운동 참여를 권유했으나 침묵으로 거부했고, 7월 친일단체 경성교풍회(京城矯風會) 회장에 추대되었다. 1920년 1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를 사퇴하였지만 6월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조선인산업대회 발기인 및 위원, 9월 범태평양협회 조선지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 11월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해 1925년 11월까지 재임했다. 1923년 1월 기독교서적 출판사인 조선기독교창문사를 창립하고 취체역을 맡았다. 1924년 4월 일선융화를 표방하는 동민회(同民會)에 가입했다.

1925년 3월 이상재(李商在), 신흥우(申興雨) 등과 함께 비밀결사 흥업구락부를 조직하고 회계를 맡았다. 7월 조선체육회 위원,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창립하고 위원장에 위촉되었다. 1927년 3월 이상재 선생 사회장 장의위원장, 10월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 총재가 되었다. 1928년 8월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1937년 7월까지 재임하고, 이후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0년 12월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 겸 재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에모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 5월 이충무공유적보존회 결성에 참여했고, 10월 토요회에 가입하는 한편 만주동포문제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7월 안창호 석방을 위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담당자와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33년 6월 중앙진흥회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1934년 3월 31일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직 제의를 거절했다. 같은 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직 제의와 1935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직 제의 또한 거절했다.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이사로 위촉되었고, 같은 해 10월 조선총독부 어용단체인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이사를 맡았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 주최한 시국대응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고 황군위문금 1,000원과 국방헌금 4,000원을 냈다. 이 무렵 ‘애국경기호’ 비행기 구입비 500원도 헌납했다. 8월에는 「내선인(內鮮人)은 동일운명-거선(巨船)의 항해에 임하라」(『매일신보』1937.8.15.)라는 글을 발표했고 주3에서 지내는 기원제거행준비회 발기인 겸 위원으로 참여해서 9월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중일전쟁 정당성을 홍보하는 시국강연 연사로 평안남도 일대에서 강연했다. 12월 일본군의 난징 함락을 기념하여 조선신궁에서 거행한 난징함락전첩봉고제 위원장을 맡았다.

1938년 2월 조선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 발기인 겸 실행위원으로 참여해 회장에 추대되어 조선신궁에서 봉고제를 지냈고, 4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5월 일본군의 쉬저우 함락을 기념해 조선군사령부에 1만원의 국방헌금을 기탁하는 한편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을 만나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절했다. 같은 해 5월 기독교계의 친일협력을 위해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에서 평의원, 7월 평의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가 되었다. 8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대한 취조를 받았고, 9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 연합지부 평의원, 10월 일본기청조선연합회(日本基靑朝鮮聯合會) 회장을 맡았으며, 12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순회강연반의 전라남도 지역연사로 참여했다.

1939년 2월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고문과 조선지원병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6월에는 조선군 제20사단 사령부에 ‘일선장병 휼병금’ 2,000원을 헌금했으며, 7월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40년 6월 이토 지코(伊東致昊)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8월 재만조선인교육후원회 위원장, 9월 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0월에는 조선총독부 시정 30주년 기념식에서 민간공로자 표창을, 다음달인 11월에는 기원 2600년 축전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41년 2월 연희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41년 3월 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에서 주최한 시국대응신도대회에서 ‘내선일체의 완벽’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5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9월 흥아보국단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 상임위원에 위촉되었다. 같은 달 임전대책협력회가 주최한 대연설회에서 ‘극동의 결전과 오인(吾人)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고 채권가두유격대(債券街頭遊擊隊)에 참여하여 종로에서 채권을 팔았다.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11월 조선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경성부민관에서 주최한 결전보국(決戰報國)대강연회에서 ‘결전체제와 국민의 시련’이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1942년 2월 국방비 5,000원을 종로경찰서에 바쳤다. 조선인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이를 환영하는 「대어심(大御心)」(『매일신보』 1942.5.10.)과 「징병제도 실시의 감격」(『문교의 조선』 1942.6.)이라는 글을 싣고 징병제실시기념 강연회에서 연사로 참여했다. 그해 8월 연희전문학교 교장에서 물러났다. 1943년에도 지원병과 징병제 참여를 독려하는 「총출진하라」(『매일신보』 1943.11.18.)와 「학병을 보내는 명사의 말-장하다, 그대들의 용단, 오직 순충봉공(殉忠奉公)에 몸을 바치라」(『매일신보』 1943.11.22.)라는 글을 발표했다. 1944년 6월 국민총력운동조선연맹 고문, 9월 국민동원총진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1월 중추원 참의들과 함께 학병독려연설을 했고, 12월 반도무훈현창회(半島武勳顯彰會)에 참석했다. 1945년 2월 대화동맹(大和同盟) 위원장을 맡았고, 4월 3일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었다.

저서로 『우스운 소리』 · 『영어문법첩경』이 있고, 역술서로 『찬미가』, 번역서로 『의회통화규칙』 · 『이솝우화[伊索寓話]』 · 『걸리버여행기』 등이 있다.

윤치호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8 · 9 · 11 · 13 · 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58∼44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신문(獨立新聞)』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윤치호 일기로 보는 식민지 시기 역사』(김상태 편역, 산처럼, 201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윤치호일기』(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2001)
『좌옹 윤치호 선생 약전』(김영희, 좌옹윤치호문화사업위원회, 1999)
『개화기의 윤치호연구』(유영렬, 한길사, 1985)
『윤치호서한집』(국사편찬위원회, 1980)
『좌옹 윤치호전』(김을한, 을유문화사, 1978)
「윤치호의 해외체험과 문화수용」(허동현, 『한국문화연구』11, 2006)
「윤치호의 문명개화의식과 반청자주의식」(유영렬, 『한국독립운동사연구』23, 2004)
「윤치호의 근대변혁 방법론」(유영렬, 『사학연구』32, 1981)
「윤치호의 전통관과 국가관」(유영렬, 『사학연구』29, 1979)
「초기 윤치호의 기독교신앙과 개화사상: 1883년에서 1905년까지를 중심으로」(민경배, 『동방학지』19, 1978)
Yun Chi-ho(Donald, N. Clark, Occasional Papers on Korea, University of Washington, 1975)
Yun Chi-ho in America(Kim, Hyung-chan, Korea Journal, Vo1.18 No.6, 1978)
Hon. Mr. Yun Chi Ho(Kim, Kiu Sik, Korea Mission Field, Vol.Ⅵ No.8, 19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주석
주1

루셔스 하우드 푸트, 미국의 외교관(1826~?). 초대 미국 공사로 부임하여, 민영목(閔泳穆)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비준ㆍ교환하였으며, 갑신정변 때에는 변란의 조정에 힘썼다.    우리말샘

주2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미국의 외교관(?~1908). 광무 8년(1904)에서 융희 2년(1908)까지 우리나라에 머무른 외교 고문으로, 귀국하여 일제의 침략 정책을 찬양하고 선전하다가 전명운, 장인환에게 피살되었다.    우리말샘

주3

일제 강점기에, 서울 남산에 세운 신사. 1912년에 조선 신사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다가, 1925년에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국인에게 참배를 강요하였으나, 1945년 광복 이후 해체되고 소각되었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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