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주서 · 성균관전적을 거쳐 1591년 사헌부지평이 되고 이듬해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검찰사(檢察使)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어 홍문관부응교 · 세자시강원필선 · 사헌부장령 · 성균관사예 · 홍문관교리 · 홍문관전한 등을 거쳐 1594년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다시 필선이 되었다가 보덕으로 승진하고, 사헌부집의 · 홍문관응교 등을 거쳐 1597년 말에는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성균관사예 · 사간 ·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9월 통정대부에 오르고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부승지 · 병조참의 · 대사간 · 형조참의 · 도승지 · 병조참판 ·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602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성천부사로 부임해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리고 학교를 크게 일으켜서, 지금까지 그 고을에서 한 명도 내지 못한 소과 합격자를 내어 학구열을 불러일으켰다 한다.
1606년 중앙으로 다시 올라와 성균관대사성 · 도승지 · 형조판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재질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 공도(公道)를 칭찬받기도 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 ·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611년 가을 동궁고명면복주청사(東宮告命冕服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2년에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책록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져 공조판서가 되었다. 1616년 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여흥부원군에 봉해졌다. 1618년 좌찬성에 올라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위성공신이 혁파되어, 훈봉이 삭탈되고 1품계가 강등되는 동시에 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소릉집(少陵集)』이 있다. 뒤에 선조조의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