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휴(汝休), 호는 용암(龍巖). 승지 이유번(李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이석명(李碩明)이다. 아버지는 현령 이민선(李敏善)이며, 어머니는 김봉(金崶)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18년(광해군 10) 광해군의 문란한 정사를 피해,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선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성균관박사를 거쳐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입시(入侍)해 사초(史草)를 지을 때 글을 거침없이 쓰니, 왕이 매우 기뻐해 말 한 필을 상으로 내려준 일이 있었다.
1636년 황해도도사로 있을 때 청나라의 침입을 맞아 감사를 대신해 산성을 지키고, 적의 포로가 된 주민들이 탈출해오자 이를 보호하였다. 한편 적병 100여 명을 잡았으나 무공을 조정에서 알지 못했다 한다.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장령으로서 김자점(金自點) 일당의 죄를 거론해 김자점을 귀양시켰다. 이듬 해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진주목사로 있을 때 정사를 잘해 다시 소환되어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었다. 그러나 1654년(효종 5) 폐서인(廢庶人)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강씨(姜氏)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 사형된 감사 김홍욱(金弘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되고 성주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이듬 해 다시 안동부사에 기용되고 여러 곳의 부사를 지낸 뒤 참의 · 승지 · 판결사를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 5)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6년 황해도감찰사가 되어 그 지방의 학교 시설을 적절히 폐치(廢置), 정리해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이 지방의 민폐에 관한 옛 사실이 현종의 노여움을 사 체포되었으나, 당시 상신(相臣)인 이경석(李景奭)이 왕에게 간청해 용서받고, 제조(諸曹)의 참의 · 승지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충청도 청풍부(淸風府)에 은거하며, 주민을 위한 구휼사업 · 수리개발로 수도전(水稻田)을 개척해 농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73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면직을 청하고 시폐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저서로는 『삼인사적(三仁事蹟)』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