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일 ()

이상일 글씨
이상일 글씨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승지, 동지부사, 황해도감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림(汝林)
용암(龍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00년(선조 33)
사망 연도
1674년(현종 15)
본관
벽진(碧珍: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주요 관직
성균관박사|황해도도사|사헌부장령|진주목사|승지|동지부사|황해도감찰사
관련 사건
김홍욱의 옥사 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승지, 동지부사, 황해도감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휴(汝休), 호는 용암(龍巖). 승지 이유번(李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이석명(李碩明)이다. 아버지는 현령 이민선(李敏善)이며, 어머니는 김봉(金崶)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18년(광해군 10) 광해군의 문란한 정사를 피해,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선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성균관박사를 거쳐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입시(入侍)해 사초(史草)를 지을 때 글을 거침없이 쓰니, 왕이 매우 기뻐해 말 한 필을 상으로 내려준 일이 있었다.

1636년 황해도도사로 있을 때 청나라의 침입을 맞아 감사를 대신해 산성을 지키고, 적의 포로가 된 주민들이 탈출해오자 이를 보호하였다. 한편 적병 100여 명을 잡았으나 무공을 조정에서 알지 못했다 한다.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장령으로서 김자점(金自點) 일당의 죄를 거론해 김자점을 귀양시켰다. 이듬 해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진주목사로 있을 때 정사를 잘해 다시 소환되어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었다. 그러나 1654년(효종 5) 폐서인(廢庶人)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강씨(姜氏)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 사형된 감사 김홍욱(金弘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되고 성주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이듬 해 다시 안동부사에 기용되고 여러 곳의 부사를 지낸 뒤 참의 · 승지 · 판결사를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 5)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6년 황해도감찰사가 되어 그 지방의 학교 시설을 적절히 폐치(廢置), 정리해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이 지방의 민폐에 관한 옛 사실이 현종의 노여움을 사 체포되었으나, 당시 상신(相臣)인 이경석(李景奭)이 왕에게 간청해 용서받고, 제조(諸曹)의 참의 · 승지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충청도 청풍부(淸風府)에 은거하며, 주민을 위한 구휼사업 · 수리개발로 수도전(水稻田)을 개척해 농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73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면직을 청하고 시폐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저서로는 『삼인사적(三仁事蹟)』이 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송자대전(宋子大全)』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