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지는 조선전기 병조판서, 좌의정, 영의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96년(태조 5)에 태어나 1478년(성종 9)에 사망했다. 조선 초기 대표적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비록 큰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세종∼문종 대에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문한을 관장하고 역사·천문·역법·아악을 정리했다. 한글 창제에도 참여하는 등 문풍 육성과 제도 정비에 기여했다. 단종∼성종 초에는 학덕을 구비한 원로대신으로서 풍도를 지킴으로써 빈번한 정변과 어린 국왕의 즉위로 인한 경직되고 혼란된 정치 분위기와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했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제수되었다. 1415년 예문관부교리에 개수(改授)되고, 이어 감찰 ·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병조좌랑을 거쳐 1421년(세종 3)에는 상왕(上王 : 태종)의 “대임을 맡길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는 요청과 함께 병조정랑에 승직되었다. 이후 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조 · 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뽑히면서 응교에 제수되고, 직전(直殿)에 승진되었다.
142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시 직제학에 승진, 곧 세자시강원좌필선을 겸대한 뒤, 다음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또다시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1430년 10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면서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다음해에는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하였다.
1432년 예문관제학 겸 동지춘추관사(藝文館提學兼同知春秋館事), 1433년 2월 인수부윤(仁壽府尹), 같은 해 6월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434년 4월 이조좌참판에 발탁되고, 같은 해 10월 다시 예문관제학을 거쳐 1435년 6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다음해 9월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7년 세종의 문운 육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기복(起復)되어 예문관제학에 서용되었다.
1439년에는 집현전제학이 된 뒤 곧 형조참판으로 옮겼다가 1440년 5월 정연(鄭淵)의 천거를 받아 형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11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였다.
이듬해 지중추원사로 당시에 찬 · 반의 논의가 격렬하던 공법(貢法)을 극력 주장, 그 실시를 확정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의 제조(提調) 및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파견되어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전품(田品)을 분정(分定)하는 등 내 · 외의 전제사를 주관하였다.
1445년 1월 우참찬이 되고, 그 해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하였다. 1446년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세종의 듯을 받들어 다른 집현전 학자들과 훈민정음 창제에 협찬하였고 훈민정음 서문을 찬진하였다. 같은 해 예조판서를 거쳐 1447년에는 이조판서 겸 지춘추관사가 되어 『태조실록』을 증수(增修)하는 데 참여하였다.
한편으로는 전라도에 파견되어 전품을 다시 상정하였다. 1449년 공조판서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년) 좌참찬이 되고, 1451년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고려사』를 개찬(改撰)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김종서 등과 함께 다시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병조판서가 되어 병정(兵政)을 관장하면서 단종을 보필했으나, 그의 강직함을 꺼려한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의 배척을 받아 품계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으나 관직은 한직인 판중추원사로 체직되었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주도한 계유정변의 성공과 함께 정변에 협찬한 공로와 수양대군의 신임 및 그의 인망으로 특별히 좌의정에 발탁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되면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군되었다.
1452년부터 1454년에 걸쳐 편찬된 『세종실록』을 총감수(總監修)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부사에 승진되었다. 그리고 세자사(世子師)를 예겸(例兼)한 뒤 세조 즉위에 끼친 공로로 다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 공신연(功臣宴)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논죄되면서 고신(告身)이 몰수되었으나, 곧 고신을 환급받고 하동부원군에 제수되었다.
1459년 취중에 직간한 일이 국왕에게 무례를 범했다고 논죄되면서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종편(從便)되었다. 그러나 그 해에 다시 소환되어 고신을 환급받고, 그 이듬해 하동부원군에 복직되었다.
1465년 나이 70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 받지 못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다음해 관제 개혁으로 인한 부원군호의 개칭과 함께 하동군(河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로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1470년(성종 1) 부원군호의 복구와 함께 하동부원군에 개봉되고 경연영사(經筵領事)를 겸대하였다.
같은 해 1467년(세조 13)에 설치된 원상제에 따라 원상에 임명된 후 국왕의 측근에서 국정의 논의와 처결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471년 성종 즉위에 끼친 공로로 또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78년 성종의 호학 및 당시의 문운 융성과 함께 연덕(年德)을 구비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오갱(三老五更: 王師)으로 봉해 문풍을 더한층 진작시키자는 논의에 힘입어 삼로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진봉식 거행 직전에 대간의 “한미한 가문에서 기신했으나 식화(殖貨)에 전념하여 치부했으니 불가하다.”라는 반대가 있었다. 비록 한명회(韓明澮) 등의 대신이 “정인지의 식화는 장리(長利)에 불과했으니 큰 흠이 될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 실시를 주장했지만, 결국은 진봉되지 못하였다. 같은 해에 하동부원군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학과 전고(典故)에 밝아 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비록 큰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세종∼문종대에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문한(文翰)을 관장하고 역사 · 천문 · 역법 · 아악을 정리하였다. 이와 아울러 한글창제에도 참여하는 등 문풍 육성과 제도 정비에 기여하였다.
단종∼성종 초에는 학덕을 구비한 원로대신으로서의 풍도를 지킴으로써 빈번한 정변과 어린 국왕의 즉위로 인한 경직되고 혼란된 정치 분위기와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 『학역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