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로는 조선 후기 『입재집』, 『소대명신언행록』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38년(영조 14)에 출생하여 1816년(순조 16)에 사망하였다. 자는 사앙, 호는 입재, 무적옹이다. 관직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매진하다가 만년에 천거로 강령현감, 함창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향리로 내려가 성리학의 연구와 후학양성 및 저술에 힘썼다. 정종로는 〈태극권자설〉과 〈태극동정설〉 등에서 태극과 동정을 분리시키는 이원주의 이론을 비판하였다. 인물성동이론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품은 서로 같을 수 없다는 상이론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정종로는 「태극권자설(太極圈子說)」과 「태극동정설(太極動靜說)」을 통해 태극의 개념을 논의하면서 태극이나 이(理)가 동정(動靜)함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태극과 동정을 분리시키는 이원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분개간(分開看)의 개념적 분리를 인정하면서 혼융간(渾融看)의 일관성의 인식도 병행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이(李珥)의 성리학설이 이와 기가 서로 떠날 수 없음만 강조하고, 이와 동정을 분리시켜 기만의 능동성을 인정하고 이는 마치 죽은 사람이 짐처럼 말 등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본다고 비판하였다.
정종로는 “기의 동정이 바로 이의 동정이다.”라는 일관성의 이해에서 “이가 먼저 움직이고 고요하면 기가 막 생성한다(理先動靜而氣生也).”라고 하며 주리론적 입장을 밝혔다. 「이강기약설(理强氣弱說)」에서 형체가 없고 작위가 없는 이는 약하며, 형체가 있고 작위가 있는 기는 강하다고 보는 주기론적 입장을 거부하였고, 기가 이를 이기는 일은 잠시뿐이고 이가 기를 이기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 하여, 기의 주재인 이의 강함을 지적하고 주리론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에서도 마음은 이와 기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라 하고, 여기에서 이가 마음을 주재한다고 밝혀 주리론적 입장을 관철하였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관해서도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제6도인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의 상 · 중 · 하 3도 중에서 중도를 해석하면서, 사단뿐만 아니라 칠정도 본연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사단과 칠정의 양쪽이 다 이가 발동하는 동시에 기가 발동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종로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품이 서로 다르다는 상이론(相異論)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오상설(五常說)」 · 「솔성설(率性說)」 · 「일원설(一原說)」 · 「오행설(五行說)」 · 「지두설(地頭說)」 등에서 확인된다.
여기에서 정종로는 우주 안의 모든 사물을 날짐승 · 물고기 · 동물 · 식물 네 가지로 나누면서, 공중을 날고, 물속에 잠기고, 움직이고, 땅에 심어진 각각의 경우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 중에서 식물은 그 위치가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 세 경우는 그 위치가 수시로 변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동물의 하나이지만 모든 동물들과는 달리 의리를 가지고 있기에 다른 사물과 구별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원래 이는 사람과 사물의 차이가 없으나 기질의 바르고 치우친 정도의 차이에 따라 기질 속에 깃들어 있는 성품에 있어서는 사람과 사물이 다르게 되며, 따라서 사람과 사물은 근원이 동일하기 때문에 이가 같고, 부여받은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성품은 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종로의 성품론은 기호학파의 호론(湖論)에 가까운 것이다.
정종로는 「귀신론(鬼神論)」에서는 당시에 유입된 서학의 천당지옥설, 죽은 다음 영혼이 소멸되는지의 여부, 제사에서의 신주가 지닌 의미에 관해 문답하며 성리학의 영혼론을 논의하였다. 여기에서는 죽은 다음에 그 공덕을 자손에게 미치는 정도로 조상의 혼령이 남아 있으며, 조상의 기운은 자손에게 전해져서 감응할 수 있고, 제사에서 마땅한 이치가 있으면 혼백의 기도 남아 있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정종로의 문하로는 이원조(李源祚) · 강엄(康儼)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문집인 『입재집』과 『소대명신언행록(昭大名臣言行錄)』 등이 있다.
우산서원(愚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