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는 후삼국 시대에 견훤이 세운 나라이다. 견훤이 892년에 무진주에서 자립하였다가 900년에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여 후삼국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나라이다. 견훤이 신라 왕경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하였으며, 공산동수에서 고려 태조에게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고창전투와 운주성전투에서 패하면서 고려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견훤은 아들 신검에게 쫓겨났다가 고려로 귀부하였고, 신검도 일리천전투에서 고려에 항복하였다. 후백제는 2대 45년간 존속하다가 936년에 멸망하였다.
신라는 하대에 진골 귀족들의 치열한 왕위 계승전이 펼쳐지면서 점차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한 뒤에는 흉년이 계속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조세 독촉이 이어지자, 이에 대한 저항이 889년(진성여왕 3)에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 일대)에서 일어난 원종(元宗) 애노(哀奴)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발생하였다.
후백제는 견훤(甄萱)이 건국하였는데, 견훤은 본래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출신인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었다는 설도 있고 광주(光州)의 북촌(北村)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일찍이 신라 왕경에 들어가 군인이 되어 서남해의 방수군(防戍軍)으로 활동하다가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전국에 기근이 들면서 반란이 속출하는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모아서 왕경의 서남쪽 주현(州縣)을 돌아다니며 공략하였다고 한다.
견훤은 이때 불과 한 달 사이에 자신에게 호응해 온 무리 5,000명을 모아서 무진주에서 왕을 자칭하였는데, 아직 감히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 못하고 스스로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 지절(持節) ·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 상주국(上柱國) ·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견훤은 그 뒤에 다시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고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 당한 백제 의자왕의 울분을 씻어주겠다”고 표방하면서, 마침내 후백제왕(後百濟王)을 자칭하고 관직(官職)을 마련하였다.
후백제는 이처럼 건국 과정이 복잡하였는데, 그만큼 논쟁이 되는 부분도 많다. 견훤이 처음에 세력을 떨쳤던 왕경의 서남쪽 주현에 대해서는 강주(康州: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 일대)와 승주(昇州: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 일대) 지역이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광주와 순천 지역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보이는 자료에서 대부분 892년(진성여왕 6)으로 보고 있지만,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조에서 "용기(龍紀) 원년 기유(己酉)", 곧 889년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연구자들도 대체로 후백제가 892년에 건국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930년(경순왕 4)을 "42년 경인(庚寅)"으로 기록한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조를 중심으로 역산하여 889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후백제’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연표와 신라본기 진성여왕 6년조에서 견훤이 무진주에서 왕을 자칭하였던 892년으로 기록하였지만, 『삼국사기』 견훤 열전과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조에서는 완산주로 도읍을 옮겼던 900년(효공왕 4)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견훤이 무진주에서 스스로 왕을 칭하였으면서도 공공연하게 칭하지 못하였던 것은 그에게 신라의 왕이 ‘존왕(尊王)의 의(義)’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때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등과 같은 신라의 지방관을 자처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견훤이 ‘후백제’라는 나라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무진주에서 자립하였던 892년이 아니라 완산주로 도읍을 옮긴 900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무진주에서도 스스로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라고 서명하였던 것은 그가 이때 이미 전주를 중심으로 공주에서 무진주까지 아우르는 백제 계승 의식을 드러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견훤이 무진주에 도읍하였다가 완산주로 옮긴 것은 후백제의 지배 세력이 교체된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견훤은 서남해 방수군(防戍軍)을 모체로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에서 자립하였는데, 그 세력 기반의 핵심은 당시 다른 반란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적당(賊黨)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견훤이 이들을 중심으로 지배권을 강화해 나가자, 나주(羅州) 일대의 지방 세력들이 불만을 품고 이탈하였다. 그래서 무진주에 도읍하였던 후백제는 배후 지역의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견훤은 자신의 초기 세력 기반이었던 무진주를 버리고 점차 내륙으로 북상하다가 새로운 세력의 중심지로 완산주를 선택한 것이다. 견훤은 이곳에서 백제의 부흥이라는 정치적 명분을 내세우면서 백제계 후예들을 흡수하고 영토를 확대하였으며, 관서를 설치하고 직책을 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후백제의 새로운 정치 세력을 키운 것이다.
후백제는 완산주로 도읍을 옮긴 뒤부터 신라 및 후고구려와 더불어 후삼국을 형성하면서 본격적으로 패권을 다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후백제는 신라를 상대로 907년(효공왕 11)에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 이남의 10여 성을 탈취하였고,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 일대)도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901년(효공왕 5)과 916년(신덕왕 5)에 두 차례에 걸쳐 공격하였다.
그리고 906년(효공왕 10)에는 상주(尙州) 사화진(沙火鎭)에서 궁예(弓裔)가 보낸 왕건(王建)의 군대에 맞서 싸웠으며, 903년(효공왕 7) 이래로 나주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궁예에게서 지배권을 되찾을 목적으로 909년(효공왕 13) 이후부터 나주 인근의 서남해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후백제는 이때 전체적으로 후삼국 영역을 태반이나 차지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궁예의 견제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후백제는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틈을 이용하여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였다. 후백제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지 2달만인 8월 11일 신해(辛亥)에 먼저 일길찬(一吉飡) 민합(閔郃)을 보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죽전(智異山竹箭)을 선물하였다. 이것은 후백제가 고려와 화친을 맺으려는 것이었지만 고려 내부의 정세를 파악하려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려 건국에 반발하였던 친궁예 세력의 저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후백제는 이때 실제로 태봉 말기부터 웅주(熊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일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이흔암(伊昕巖)이 왕건을 제거할 목적으로 철원에 들어간 틈을 이용해서 웅주뿐만 아니라 운주(運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 일대) 등 10여 주현(州縣)의 항복까지 받았다. 그리고 매곡(昧谷: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일대) 출신의 경종(景琮)이 918년 9월에 청주 출신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 누이의 남편이었던 매곡성주(昧谷城主) 공직(龔直)을 후백제에 귀부시키기도 하였다.
후백제는 이처럼 태조 왕건의 정변에 반발하면서 이탈하는 호족 세력들을 끌어들임으로써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920년(경명왕 4)에는 아찬(阿粲) 공달(功達)을 고려에 보내어 다시 한 번 공작선과 지리산 죽전을 바치면서 화친을 맺는 한편, 보기(步騎) 1만 명을 이끌고 대야성과 구사성(仇史城: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일대)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일대)까지 쳐들어갔다.
그렇지만 고려 태조가 신라 경명왕의 요청을 받고 군대를 보내오자, 견훤은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신라와 고려가 동맹을 맺은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견훤이 태조 왕건과 겉으로는 화친을 맺었으나 속으로는 서로 대립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그러나 후백제는 924년(경명왕 8) 7월에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康)과 양검(良劍)을 보내어 대야성과 문소성(聞韶城: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의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다. 그것은 신라 경명왕과 동맹을 맺은 고려 태조에 대한 후백제의 반격이었다. 그렇지만 후백제는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였고, 고려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절영도(絶影島)의 총마(驄馬) 1필을 바쳐야 하였다.
견훤은 925년(경애왕 2) 10월에 직접 기병(騎兵) 3,000명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다시 쳐들어갔는데, 이번에는 고려에서도 태조가 직접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왔다. 견훤과 태조는 여기에서도 승패를 보지 못하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약속하고 화친(和親)을 맺었다.
그런데 고려에 볼모로 갔던 견훤의 조카 진호(眞虎)가 926년(경애왕 3) 4월에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견훤도 고려에서 볼모로 왔던 태조의 사촌 동생 왕신(王信)을 살해하였다. 후백제는 이를 계기로 고려와의 화친을 파기하고 웅진 방면으로 군대를 진격하는 등 여러 차례 고려의 변경을 압박하였다.
이에 대해 한동안 대응하지 않았던 고려는 927년(경애왕 4) 정월에 갑자기 태조가 후백제의 용주(龍州: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일대)를 쳐서 항복시켰는데, 이때 신라 경애왕이 군사를 내어 고려를 도와주었다. 이것은 용주전투에 고려 태조와 신라 경애왕의 동맹관계가 작용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때 동맹관계는 고려가 신라를 군사적으로 보호하였던 동맹이 아니라, 신라가 고려의 후백제 공격을 돕는 동맹이었다. 고려 태조는 신라 경애왕과 이러한 동맹을 맺고 후백제의 용주를 빼앗은 뒤에 운주와 근품성(近品城: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근품리 일대), 강주, 대량성(大良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일대) 등을 파상적으로 공략하였다.
후백제는 이에 대응하여 927년 9월에 근품성을 공격하여 불사르고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남도 영천시 일대)를 습격한 뒤에 전격적으로 신라 왕경까지 쳐들어가서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애왕의 외종 사촌 동생인 김부(金傅)를 경순왕(敬順王)으로 옹립하였다. 견훤은 이처럼 신라에 친후백제 정권을 세운 뒤 왕의 동생인 효렴(孝廉)과 재신(宰臣)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삼고 돌아갔다.
이때 견훤은 공산동수(公山桐藪: 지금의 대구시 팔공산 일대)에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왔던 고려 태조가 자신을 대신해서 전사한 김낙(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등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달아날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고, 대목군(大木郡: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일대)과 소목군(小木郡) 그리고 벽진군(碧珍郡: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일대) 등을 침탈하였다.
또한 928년(경순왕 2)에는 3월과 5월에 강주 지역을 다시 공략하고 7월에 청주(靑州)를 침범하였다. 8월에 대량성의 장군 관흔(官昕)이 대목군의 곡식을 약탈하고 나서 죽령(竹嶺)에서 고려를 차단하였으며, 11월에 오어곡성(烏於谷城)을 함락시키면서 고려군 1,000명을 죽이고 조물성까지 탈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929년(경순왕 3) 7월에는 견훤이 직접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여 성주 장군 홍술(洪述)을 전사시켰으며, 12월에는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까지 포위하였다.
후백제는 이처럼 신라 왕경을 습격하여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한 뒤에 고려를 압박하면서 일거에 전세를 뒤집고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930년(경순왕 4) 정월에 있었던 고창전투에서 8,0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고려에 참패하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영안(永安: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 하곡(河曲: 지금의 경상북도 울산시 일대), 직명(直明), 송생(松生: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 일대) 등 30여 군현이 고려에 귀부하였고, 2월에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 일대)로부터 흥례부(興禮府: 지금의 경북 울산시 일대)에 이르는 지역에서 모두 110여 개의 성(城)이 잇달아 고려에 귀부하였다. 견훤이 직접 옹립하였던 경순왕도 고려 태조에게 만남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931년(경순왕 5) 2월에 결국 신라 왕경에 들어가서 왕실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고 돌아갔다.
후백제는 고창전투의 패배로 그만큼 많은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 후백제가 고창전투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는 견훤이 신라 왕경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한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견훤이 이때 경애왕을 대신해서 경순왕을 옹립하였던 것은 그가 신라의 왕을 여전히 ‘존왕의 의’의 대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경애왕을 시해한 것은 ‘존왕의 의’를 강조하는 행위에 반하는 처신이었다. 따라서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한 행위는 태조 왕건의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 태조가 신라 왕경을 방문하였을 때, “전일 견씨가 왔을 때는 승냥이나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오심에는 부모를 뵌 것과 다름이 없다”는 평가를 들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이유로 견훤을 비난하였던 사람 중에는 여전히 신라 왕실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지방관 출신의 호족 세력들도 있었는데, 고창전투에서 고려에 큰 공을 세우고 대광(大匡)에 임명되었던 성주(城主) 김선평(金宣平)이나 대상(大相)에 임명된 권행(權行)과 장길(張吉)도 이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들이 경애왕을 시해한 견훤에 불만을 품고 고려 태조에 협력함으로써 결국 후백제가 고창전투에서 참패하였던 것이다.
후백제는 고창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에 급격하게 세력이 위축되었다. 그래서 932년(경순왕 6) 6월에는 공직(龔直)이 다시 고려에 투항하였다. 후백제에서는 이를 만회할 목적으로 같은 해 9월에 일길찬(一吉湌) 상귀(相貴)가 수군을 이끌고 예성강까지 쳐들어가서 염주(鹽州) · 백주(白州) · 정주(貞州) 등에서 배 100여 척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말 300필을 약탈하였다. 10월에는 해군장군(海軍將軍) 상애(尙哀)가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해서 약탈하였다.
후백제는 고려를 상대로 이러한 기습 작전을 통해 세력을 만회하고자 하였다. 934년(경순왕 8) 정월에는 고려 태조가 운주(運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 일대)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견훤이 직접 군대 5,000명을 동원하여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후백제는 여기에서 다시 3,000명이 전사할 정도로 고려에 참패하였고, 이를 계기로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그 결과 후백제는 더 이상 고려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로 위축되었다. 여기에 견훤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내분까지 발생하였다. 견훤은 10여 명의 아들 가운데 넷째 아들 금강(金剛)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찬(伊湌) 능환(能奐)과 파진찬(波珍湌) 신덕(新德) 등이 견훤의 다른 아들인 강주 도독(康州都督) 양검(良劒)과 무주 도독(武州都督) 용검(龍劒) 등과 모의하여 맏아들인 신검(神劒)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935년(경순왕 9) 3월에 신검이 마침내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뒤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그 뒤에 약 3개월 동안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막내아들인 능예(能乂)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유금필(庾黔弼)과 만세(萬歲) 등에게 맞아오게 해서 견훤을 ‘상보〔尙父〕’라 칭하고 남궁(南宮)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는 등 크게 환대하였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신검이 새롭게 왕위에 올라 사면령을 내리면서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렇지만 견훤이 고려 태조의 힘을 빌려 복수를 꾀하였고, 사위 박영규(朴英規)까지 고려에 귀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군이 936년 9월에 일선군으로 진격해 왔을 때, 후백제는 신검이 직접 이에 맞서 일리천(一利川)에서 승부를 겨뤘으나 크게 패배하였다.
후백제군은 여기에서 황산(黃山)으로 달아났다가 결국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후백제는 이로써 2대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이때 능환은 신하로서의 의리를 저버렸다고 해서 죽임을 당하였고, 양검과 용검도 유배되었다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신검은 오히려 고려 태조에 의해 작(爵)까지 받았다. 견훤은 고려 태조와 함께 전투에 참전해서 이러한 상황들을 지켜본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산의 절에서 등창을 앓다가 죽었다.
편운화상(片雲和尙)의 부도 명문에 따르면 완산주로 천도한 다음 해인 901년부터 ‘정개(正開)’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견훤은 900년에 이미 오월(吳越)에 조공(朝貢)하고 ‘검교태보(檢校太保)’ 등의 관직을 책봉받았다. 비록 909년에는 오월에 보냈던 배가 염해현(鹽海縣)에서 왕건에게 나포되기도 하였지만 918년에 다시 오월로부터 ‘중대부(中大夫)’를 더 책봉받았으며, 927년 11월에는 오월에서 온 반상서(班尙書)를 고려에 보내어 외교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925년에는 후당(後唐)의 책봉을 받았으며, 927년에는 후백제와 거란의 교류에 불만을 품은 후당이 등주(登州)에 표류한 후백제의 장군 최견(崔堅)을 거란의 사신과 함께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거란과 교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후백제는 936년 1월에 신검이 다시 후당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역사서인 『부상략기(扶桑略記)』와 『본조문수(本朝文粹)』에서 후백제가 장언징(張彦澄)과 휘암(輝巖) 등을 일본에 보내어 통교를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후백제는 이처럼 오월과 후당 그리고 거란을 포함한 중국의 여러 세력들과 일찍부터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으며, 일본과도 교섭을 시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