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에 조성한 기념탑이다. 광복 이후 가장 먼저 조성된 독립 관련 기념물이다. 탑의 상층기단 전면에는 학생들의 독립운동 모습을 부조한 청동판을 부착했다. 하층 탑신부에는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문구를 3단으로 새겼다. 탑신 전면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라 쓰인 청동판을 부착했다. 1999년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 일부를 광주학생운동 발상지로 기념화하며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하면서 기념탑도 포함되었다.
탑은 기단 · 탑신 · 상륜부로 구성되었다. 둥근 화강암의 하층 기단 사방에는 탑을 향해 만곡(彎曲)한 5단의 계단을 두었는데 해자를 건너면 탑과 주변 지역이 연결된다. 상층기단 전면에는 학생들의 독립운동 모습을 부조한 청동판을 부착하였다. 그 위의 하층 탑신부에는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문구를 3단으로 새겼다. 탑신 전면에는 세로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光州學生獨立 運動記念塔) ’이라 쓰인 이승만 대통령 친필 휘호를 새긴 청동판을 부착하였다. 상륜부에는 찰주가 회오리치는 횃불 모양의 수연을 관통하는 모습을 구현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지점이었던 광주공립보통학교가 학제개편으로 광주서중이 되었고, 1953년에 광주제일고등학교가 병설 형태로 개설되자 첫 동창회에서는 기념탑 건립을 결의하였으며 기념탑건립기성회를 조직해 모금운동을 시작하였다. 기성회는 ‘ 을지문덕동상’ 당선자로 이름을 얻은 차근호에게 기념탑 건립을 의뢰하였다.
기념탑은 1953년 9월 10일에 기공식을 가진 후 9개월만인 1954년 6월 10일에 제막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6·10 만세운동을 계승한 것임을 표방한 것이었다. 건립위원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기념탑의 명칭으로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이라는 휘호를 청하였고, 대통령은 여기에 ‘독립’이라는 글자를 추가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라는 휘호를 전달하였다.
기념탑은 불교의 전통적 화강암 탑의 구성을 따랐지만, 전면에 역사적 사건을 시각화한 장치인 청동부조판을 두었다. 가로로 긴 청동판의 좌측에는 궐기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는 분노에 가득한 표정의 남학생, 책을 든 채로 궐기하는 학생 등의 모습을 새겼다. 이는 1929년 10월 30일 통학열차에서 촉발된 역사적인 사건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 한편 상륜부에 연화 대신 불꽃문양을 두고, 기단부를 둥글게 하고 다보탑처럼 사방에 계단을 둔 점 등은 전통적 도상을 영구적인 기념물에 적용해 변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념탑 후면에는 “단기 사천이백육십이년 십일월 삼일, 이날은 광주 학생들이 일제의 탄압에 항쟁하여 일어선 민족정기의 날. 굴욕으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엄을 택하겠다는 의기로써 나도나도 뛰쳐나서자 이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무릇 오만사천여 명, 혹은 솨시슬에 묶이어 철창 아래 갇히었으며 또 혹은 피를 뿜고 쓰러졌으되 그날 그들이 높이 들었던 정의의 횃불은 그대로 역사 위에 길이길이 타오르나니 어허 여기 흐르듯 고인 그들의 피와 눈물은 천지와 더부러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여기 서린 채 깃들인 그들의 넋과 뜻은 겨레의 갈 길을 밝히 비치리로다. 단기 사천이백팔십육년 십일월 삼일 여기에 온 국민의 열화 같은 힘과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다”라는 비문을 양각하였다.
1972년 기념탑의 주변을 정비하였고, 이후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 영역 일부를 광주학생운동 발상지로 기념화하며 1999년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하였는데 기념탑도 이때 이 영역에 포함되었다.
광복 이후 가장 먼저 조성된 독립 관련 기념물이다. 아울러 기념탑에 전통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내용과 형식에서 전통과 현대를 적절히 조화시키고자 한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