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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貢賦)

고려시대사제도

 국가에서 각 군현의 산물에 부과한 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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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고려시대사
유형
제도
시대
고려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국가에서 각 군현의 산물에 부과한 현물.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학자에 따라 제도적인 조세의 특정항목이 아니라 조세 일반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고, 세목(稅目)으로서의 전세(田稅)·공물(貢物), 때로는 양자를 총칭하는 용어라는 설도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고려 이전에는 공부제(貢賦制)의 분화 없이 당나라의 세법을 모방한 조(租)·용(庸)·조(調)의 구별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에는 군현제가 정비되면서 949년(광종 즉위년)에 각 주·현의 세공(稅貢)을 정하였다. 1041년(정종 7)에는 삼사(三司)의 건의로 각 도의 주(州)·부(府)에 매년 세공을 결정해 시행하도록 하였다.[표 1]
1066년(문종 20) 상공(常貢)·별공(別貢)이 정해졌으며, 상공의 우피(牛皮)·근각(筋角)은 미(米)·포(布)로 대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108년(예종 9)에는 중포(中布) 1필을 평포 1필 15자, 저포(紵布) 1필을 평포 2필, 면주(綿紬) 1필을 평포 2필로 대납하도록 하는 평포절납제가 되었다.
고려 후기의 부세제도는 1269년(원종 10)과 1314년(충숙왕 원년) 두차례에 걸쳐서 개편되었다. 1269년(원종 10)의 공부제 개편은 같은 해의 전민변정(田民辨正), 호구계점(戶口計點), 원종 12년 녹과전제 실시 등 개경환도를 전후해 실시된 경제구조 개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원종 10년 공부제의 개정내용은 몽고와의 전란 후 피폐한 경제상을 고려해 당시의 인호(人戶)를 기준으로 공부의 액수를 재조종한 것이었으며, 1288년(충렬왕 14)에는 충청·전라·경상·서해도의 공부를 정하였다.
1314년(충숙왕 1)의 충선왕 유시에서는 전쟁 후 민호가 감축되고 전답이 황폐해져서 1269년(원종 10) 양전(量田)한 결과 책정된 액수를 그대로 거두는 것이 어려워지자, 당시의 전답과 호구의 실정에 따라서 공부를 다시 정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공부제는 원칙적으로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였다. 1392년(태조 1)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을 설치해 고려시대의 제도적 폐단을 시정하고자 토지의 산물에 의거해 공부의 등제(等第)를 정하고 이에 따라 상납할 액수를 책정하였다.
1408년(태종 8) 제주에 공부가 실시되고, 1413년(태종 13) 함길도와 평안도의 공부를 정함으로써 공부제는 전국적인 실시를 보게 되었다. 세종 때 공부상정안(貢賦詳定案)이 작성되었고, 1464년(세조 9)에는 공물의 액수를 세종 때의 3분의 1로 감하였다.
1469년(예종 1)에는 공조판서 양성지(梁誠之)가 공물의 분정(分定)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함을 지적하고, 각 지방의 토산물로 공부를 정하고, 그 수량의 다과를 고르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1470년(성종 원년)에는 공납제의 합리성을 내세우고 제도상의 미비점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주요내용은 공물의 수량을 등사해서 궁문에 내걸어 백성에게 널리 알릴 것, 수령의 영납(領納)을 금지시킬 것, 그리고 공탄(貢炭)은 일반백성이 마련해 상납하기가 어려운 점, 모피의 가격이 비싸서 불편한 점, 수령이 감납(監納)할 때 두량(斗量)에 따른 부정이 성행해서 불편한 점 등 공납상의 불합리를 시정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공납의 절차 등을 개정하고 공안의 상정도 진행시켰으며, 공납과정에서 일어나는 중앙 각 사 관리들의 농간을 견제하기 위해, 금지조항 6개 항목을 제정해 널리 알리게 하였다. 1501년(연산군 7)에는 공안상정청을 설치하고 공부를 재조정하였다.
공부에는 상공·별공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구별기준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상공은 해마다 각 주·현으로부터 일정한 양의 현물세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별공은 특수생산 장소인 각 소(所)에서 공출하는 것으로, 동·철·자기·지·묵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설, 상공은 주현세공(州縣歲貢)이며, 별공은 임시과세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설, 상공은 지방적인 차별없이 일률적인 생산물을 부과하는 것이고, 별공은 토산물의 납공(納貢)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설, 상공은 제도적으로 상정(常定)된 공물을 말하는 것이고, 별공은 상정된 것 이외에 정부에서 필요한 물품을 불시에 특별차정(特別差定)해 납공하였던 것이라는 설, 상공은 미·포·사면(絲綿)·유밀(油蜜) 등을 바치게 한 것으로, 포가 그 중심을 이루었고, 별공은 지방토산물을 따로 바치게 한 것이라는 설 등 여러가지의 견해가 있다.
넓은 의미의 공부는 군현단위로 책정되는 현물부세로서 군현 내 농민들이 부담하는 각종 토산물로 충당되는 것이었으므로 그 품목은 조세의 주요 수취대상인 미곡과 다양한 지방토산물로 내는 공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세는 쌀·보리·콩 등 미곡이 중심이었으므로 품목도 한정되어 있고 수취물의 변동을 제외하고는 수취내용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반면 공물은 각 지방의 다양한 토산물이 수취대상이었으므로 품목도 다양하고 수취내용도 복잡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포류(布類)가 중심이었고 기타 수공업제품, 광산물, 자연채취물 등의 품목들은 각 소의 거주민들이 전업적으로 생산해 국가 소용의 다양한 용도에 충당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는 공물의 종류로는 우피·근각·주포(紬布)·세저포(細紵布)·세마포(細麻布)·설면자(雪綿子)·능(綾)·나(羅)·황마포(黃麻布)·세포(細布)·말[馬]·주육(酒肉)·생마(生麻)·밤[栗]·잣[柏]·시탄(柴炭)·곤포(昆布)·곽(藿)·해태(海苔)·약재(藥材) 등이 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공부제에 변화가 일어나 농민들이 부담하던 부세의 명칭이 달라지며 수취내용에도 변화가 생긴다. 즉, 인종에서 의종대까지 주로 조(租)·역(役)·포(布) 또는 조(調)로 지칭되던 세목이 삼세(三稅)·상요(常搖)·잡공(雜貢)으로 대치되어, 조·역·포 삼세에 상요·잡공이라는 현물세가 따로 첨가되고 있다.
몽고와의 전쟁으로 전국의 소가 점차 해체되어 가면서 소로부터의 다양한 생산품의 공납이 어려워지자 국가는 이를 군현의 일반 농민들에게 전가하게 되고 그 결과 일반 군현민들에게 조용조 3세 외에 상요·잡공이라는 새로운 세 명목이 병과되었던 듯하다.
따라서, 고려 말에 오면 호포와 잡공이 함께 부과되다가 조선 초에는 호포제가 폐지되고 잡공이 제도화되어, 군현 농민들이 부담하던 공물의 품목도 포보다는 각 지방의 토산물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조선시대 지방의 각 관청에서 정부에 상납하였던 공물의 품목은 매우 다양하였는데,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의 각 도별 품목을 보면, 일반 공물·약재·종양약재(種養藥材) 등으로 대별되며, 도별로 그 품목수에 차이가 있었다.
공물의 부담은 원래 민호부담에 관한 분정규제(分定規制)가 따로 없고, 군현을 단위로 하는 공물의 품목과 수량이 규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지방관은 이것을 다시 민호에 부담시켜 수합함으로서 공납의 책임을 다하였다. 고려시대의 경우는 분명하지 않으나, 조선시대는 지방관부에 분정된 공물이 모두 민호에 배정되지는 않았다.
1450년(문종 즉위년) 10월 우사간 최항(崔恒) 등의 상소에 지지(紙地)·전칠(全漆)·청밀(淸蜜)·지율(芝栗) 같은 물품은 지방관부에서 직접 갖추어 상납하기 때문에 그 폐해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면 민호에 배정할 수 없는 성질의 공물을 지방관부에서 직접 준비해 상납하는 품목이 적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1466년(세조 12) 11월 대사간 양성지의 공안개정론(貢案改定論) 중에는 지방관부가 직접 준비해 상납하는 것과 백성이 스스로 마련해 상납하는 관비공물(官備貢物)과 민비공물(民備貢物)이 구별되어 있으나, 그 구별기준은 명확하지 않고, 다만 일반농민들이 쉽게 마련할 수 있는 직조물·수산물·과실류·목재류 등을 제외한 특수품목과 종양약재 등이 관비공물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품목과 수량은 지역의 특성에 따라 서로 달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밖에 특이한 경우로 특정 공물의 부과대상을 관부가 아니라 직접 민호에 두었던 사례도 있다. 충청·풍해(豊海)·강원도에는 정상탄(正常炭), 정속호(定屬戶) 외의 각 호와 경상·전라도의 각 호에는 오승포(五升布)를 수납하게 한 일이 있었고, 제주도의 공마규정(貢馬規定)에 보면 대호는 대마(大馬) 1필, 중호는 중마(中馬) 1필, 소호는 5호가 어울러 중마 1필을 바치게 한 사례도 있다.
공물의 수취는 군현을 단위로 한 집단적인 것으로서 매년 미리 주·부·군·현 등 지방 각 관의 공액이 일괄적으로 책정, 할당되고, 각 군현은 다시 이것을 그 군현에 거주하는 농민들로부터 수취해 지방관리의 책임하에 왕실과 정부의 각 기관 등에 헌납하였다.
정부 각 기관마다 그 직장(職掌)에 따라 취급하는 공물의 품목이 각각 결정되어 있었으며, 지방 각 관은 분정된 공물을 수개의 정부기관에 상납하고, 정부의 각 관아는 필요한 공물을 조달하기 위해 지방관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공물의 수취과정은 각 지방촌락에서 주·부·군·현을 통해 정부의 각 관부로 납입되었는데, 이때 직접 공물의 수취사무를 담당하였던 존재로는 지방촌락의 촌장과 향리, 그리고 수령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향리들이 할당된 세액을 거두어들이지 못해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으며, 조선시기 수령이 공부를 정할 때 간혹 호구의 다소와 경지의 다과를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가 공평하지 못하였다거나, 공부의 징수·상납이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의 기준이 되었던 것으로 보아, 공물 수취가 향리나 수령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물수취의 절차는 식견 있는 자로 제읍의 공리(貢吏)를 정하고, 공물의 수량 및 수납관사의 이름, 발정(發程)하는 날짜, 공리의 이름 등을 기록해 호조에 올리게 되며 호조에서는 그 노정의 원근을 고려해 기한을 정하고, 기한 안에 도착하지 않는 자는 처벌하였다.
또한, 외공진성(外貢陳省)이 호조에 당도하면 호조에서는 그 날짜 및 물품명과 수량을 기록하고 대조한 뒤 각 사(司)에 보낸다. 그러면 각 사의 관원은 그 공물을 직접 수납하고 명문(明文)을 호조에 올리며 호조에서는 이를 장부에 올리고 그것을 공리에게 내어주게 하였다.
공물은 원칙적으로 공안(貢案)의 법식에 따라 수취되고, 수취된 공물은 횡간(橫看)에 의해 국가의 재정에 용도별로 지출되었다.
수취기준은 국가의 일차적인 수취단위인 군현의 경우 호구와 전결(田結)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많은 혼란과 모순이 빚어졌으므로 공물차정 때 호구나 전적을 기준으로 부과하는 수령이 있게 되면 오히려 현치수령(賢治守令)으로 간주되는 상황이었다.
각 군현이 일반농민들에게 공물을 부과할 때는 호가 기준이 되었으므로 호등법(戶等法)이 공물분정의 기준이 되었다.
고려 전기의 호등제는 9등호제였으나 우왕 때에 조준(趙浚)이 토전경작의 다과에 의거해 상·중·하 3등호제로 정하도록 상소했던 사례나 1362년(공민왕 11) 농민들로부터 증렴(增斂)을 할 때, 대호는 미두 각 1석, 중호는 미두 각 10두, 소호는 미두 각 5두를 징수하였던 사례 등을 보면, 고려 말의 경우는 3등호제가 널리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등의 기준은 고려 전기 이래 각 호의 인정(人丁) 수를 기준으로 규정되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인정과 토지를 절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조선시대도 호적의 등급을 기준으로 하여 공물을 부과하였다.
1392년(태조 원년)에는 대호 10정(丁) 이상, 중호 5정 이상, 소호 4정 이상이라 하여 호를 3등으로 구분하고 일시적으로 인정다과에 따라 등급을 정하는 계정법(計丁法)을 따르기도 하였으나 1398년(태조 7) 토지의 다소와 인정의 다과를 병행하는 계정·계전법(計丁計田法)이 시행되었다. 계정·계전의 절충적 기준은 1415년(태종 15)과 1432년(세종 14)에도 보이지만 점차 토지를 기준으로 공납액을 정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1435년(세종 17)에는 민간의 간전(墾田)의 다소에 따라 대소 5등으로 구분해 이 등급에 의해 공물을 책정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공물의 분정은 그 지방의 산물의 종류와 다소에 따라 액수가 책정되었으며, 일단 정해진 공부의 수량은 원칙적으로 변경할 수 없었다.
다만, 국왕의 특은(特恩)에 의해서만 감면이 허용되었다. 공물의 수송과 공급의 기한에 관하여는 고려시대의 것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시대는 경상·전라·충청·황해도의 연해 군·현은 해로로 조운하고, 경기·충청·강원도는 한강과 가까운 수로를 이용하였으며, 그 밖의 지역은 육로로 통하였다.
공납기한은 태종조에 근도(近道)는 연말로, 원도(遠道)는 이듬해 6월로 규정하였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세공(稅貢)은 이듬해 6월까지 전세(田稅) 이외의 공물은 2월까지로 규정되어 있다.
공물수취는 본래 조세에 비해 그 부담이 훨씬 무거웠고, 수취체계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조선 후기 대동법이 실시될 무렵 조세는 원칙적으로 1결당 4두를 취한 데 반해 대동미는 결당 전세의 3배인 12두를 수취하였으므로, 공물수취가 국가재정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였으며, 이에 따른 모순과 폐단도 컸다.
고려시대 공부제에 여러가지 불합리한 모순을 낳게 한 중요한 원인은 ① 국가가 책정하는 공부의 액수가 군현 단위로 부과되고, 군현이 농민에게 부과하는 공물의 양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책정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중간관리의 착취가 심하였고, ② 군현 공부의 액수를 정하는 데 전결과 호구의 이중적인 기준이 적용되어, 군현에 따라 호구는 많은 데 전결이 적은 곳도 있고, 또는 반대의 경우도 있어 호구와 전결을 어떻게 적용시키느냐에 따라 그 액수에 상당한 차이가 생길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취과정에서 기준이 원칙대로 적용된 예는 극히 드물어, 심지어는 수취사무를 담당하고 있던 관리가 소관지방의 호구수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일반농민에게 공부를 책정하고 있는 사례도 허다하였다.
③ 공물의 종류가 지방에 따라 각각 다르고, 또 그 품목이 잡다하였기 때문에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시키기 어려웠으며, 각 군현에 책정된 공물의 품목 가운데에는 그 지방토산물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예컨대, 고려 말에는 특수한 지리적 조건 아래에서만 생산되는 인삼을 산지가 아닌 곳의 농민들에게도 부과해 산지까지 가서 채납하게 한 일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현상은 여전하였으며 이는 공물대납제의 폐단이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대납제는 고려시대부터 제도화되었던 것으로, 본래의 목적은 국가가 제때 필요한 세수를 확보하고 백성들에게도 상납하기 어려운 품목을 다른 물품과 바꾸어 내게 함으로써 도움을 주기 위한 방안이었는데, 대납청부업자들이 먼저 자신의 물품을 선납하고 지방에 내려가 농민들로부터 실제 가격의 배액을 받아 폭리를 취하였으므로 농민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이 되었다.
나아가 대납으로 치부를 하게 된 대납업자들은 각 창고·시서(寺署)의 관리들과 결탁해 기한 안에 납입하는 공물까지도 즉시 납입하지 않고, 일부러 날짜를 연장해 대납의 방편으로 삼았으므로 또 다른 폐단을 낳았다.
즉, 일반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납 공물의 연체로 인해 국가의 재용이 부족하게 되었고 결국 1468년(예종 즉위년) 10월 17일에는 승정원과 호조에 명해 대납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공부제의 폐단은 대납 이외에도 정액 이외의 것을 징수하는 횡렴(橫斂), 그 해에 해당되는 공부 외에 이듬해의 공물까지 미리 징수하는 예징(豫徵)·방납(防納) 등 여러가지 형태의 불법이 자행되고 있었다.
특히 방납이란 백성의 희망여부나 그 물품에 관계없이 방납자가 마음대로 지방 각 관의 공납의무를 대신한 다음, 비싼 대가를 강제로 징수해 사리를 취하는 행위로서, 조선 초기부터 그 사례가 보이며, 방납업자들이 사주인(私主人)·경주인(京主人) 등 소속관리와 결탁해 착복하는 등 폐단이 극심해져서 국가는 국가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고통이 심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공물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공안을 개정하고, 성종조 이래 공물을 그 지방 토산물로 분정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으며, 공물방납의 주역을 맡았던 중앙 각 사의 서원(書員)을 없애고 서리(書吏)를 대신 임용하기도 하였으나, 그 업무의 전문성 때문에 기대하였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또한 공물방납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사회적 여건 속에서는 법규에 규정된 처벌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공물방납의 폐해를 뿌리뽑기 위한 수미법(收米法)이 거론되어 마침내 1608년(광해군 즉위년) 5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으로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각 군현 토산품의 공납을 대납하게 한 대동법은 차차 확대되어 숙종 때에 오면 전국적으로 시행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금납제(金納制)로 개혁되면서 현물을 직접 납부하는 공부의 형태는 수취체제상에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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