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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인(貢人)

    조선시대사제도

     조선 후기 중앙 각 궁(宮)·관부(官府)에 필요한 물자의 조달을 맡았던 어용적 공납청부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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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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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중앙 각 궁(宮)·관부(官府)에 필요한 물자의 조달을 맡았던 어용적 공납청부업자.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공물주인(貢物主人)·공주인(貢主人)·공계인(貢契人)·각사주인(各司主人) 또는 주인(主人) 등으로도 불렸다.
    대동법 실시 이전에도 각 지방에서 관청에 바치는 공물을 중간에서 방납(防納)하는 상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방납상인이 아닌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특권적인 조달상인(調達商人)이 활동하게 되었다.
    공인의 구성은 일반 공물주인[各司私主人]·시전인(市廛人)주 01)·공계인·공장(工匠)·기인(其人)주 02)·경주인(京主人) 등이었다. 일반 공물주인이나 공계인 등은 직업상의 전통이 없는 서울의 도민(都民) 무직자가 대동법 실시에 따라 전업적인 공물청부업자로 등장한 새로운 상인 계층이었다.
    그 중 공계는 토호(土豪)·부상(富商)에서 호노(豪奴)주 03)·한복(悍僕)주 04)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신분이 영리를 목적으로 조직한 계이다.
    즉 도민들 중에는 자기 자본 없이 공납청부라는 전업적 직업을 가지려고 전(廛)이나 계를 신설하거나 공물을 신설, 공인이 되려는 자가 많았다.
    시전공인의 경우 시전상인으로서 공인의 직업을 겸한 자이다. 공장은 공조에 속한 준공인적 성격의 공인이다. 그들은 공물의 종류에 따라 제품 값을 먼저 받은 뒤, 제품을 만들어 납부하는 것이 불가피할 경우에 물품은 공가(貢價)를 받아 제작, 상납하였다.
    기인과 경주인은 그들의 직능을 그대로 전승하면서 공인으로 전환된 자이다. 기인은 시탄(柴炭)이라는 특정 공물의 주인이다. 경주인은 각기 해당 읍의 공물청부와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일반 공물주인과는 구별된다.
    대동법 실시 후 공물청부업에 종사한 자로서는 그밖에 각 관사에 소속된 원역(員役)·차인(差人)·감고(監考) 등을 비롯, 각 사(司)의 하인(下人)·전례(典隷)들도 있었다. 이 경우 대체로 편의상 또는 처우상 공물주인을 새로 정하는 대신, 이들에게 대행하게 한 것이어서 직분상 본직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편, 공인은 소속 아문이 있고 없음에 따라 유속사공인(有屬司貢人)과 무속사공인(無屬司貢人))으로 대별된다. 유속사공인들은 대개 소속된 아문 명을 따서 ‘장흥고공인’·‘사재감공인’·‘선공감공인’ 등으로 불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소속 아문의 공물 명에 따라 ‘선공감압도계공인(繕工監鴨島契貢人)’·‘선공감장목계공인(繕工監長木契貢人)’·‘선공감송판공인(繕工監松板貢人)’ 등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유속사공물의 담당 공인은 소관 아문에서 선정되었다. 공물아문들은 대개 선혜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지급된 공가로서, 외부인을 공인으로 임명하거나 당해 아문의 원역·전례·공장들에게 공물을 구입 또는 제조해 납품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반드시 시행 세칙인 공안절목(貢案節目)을 마련하고 있었다.
    공가는 공인만이 아니라 관원으로부터 서원(書員)·고직(庫直)·색구(色驅)·전복(典僕)·공장·청직(廳職)·방직(房職)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분배되었다. 이 경우의 공인들은 서원·전복 등 하속에 가까운 존재로 무속사공인에 비해 소속 아문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무속사의 원공공계인(元貢貢契人)은 소관 아문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선혜청에 직속된 공인이 적었던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유속사 공인에 비해 아문에 대한 독립성이 상대적으로 강했고 유속사공인보다 영세했던 것이 특징이다.
    공인은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서 택해진 만큼, 공물무납업(貢物貿納業)은 시전과 함께 도민의 중요한 생업이 되었다. 때문에 흔히 도민은 시민(市民)이 아니면 공인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공인층은 크게 제도적으로 보장된 공가 자체의 이윤을 추구하는 층과, 그러한 이윤과 함께 유통 및 제작 과정에서의 잉여와 공인권이 보장하는 특권을 추구하는 층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자가영리적(自家營利的)인 공인과 부호층이고 후자는 상인 세력이다.
    그런데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공인층의 여러 변동 요인에 따라 전자는 18세기 이후 점차 도태되어 갔다. 그러나 후자는 계속 공인권에 투자하면서 성장해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인은 경제 활동의 방식에 따라 상인적인 공인과 수공업자적 공인으로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 상인적 공인은 공가를 받아 공물을 매입 납품했지만, 수공업자적 공인은 공가를 받아 공물을 제조해 납부하였다. 따라서, 양자는 같은 공인이지만 각기 상인과 생산자라는 차이가 있었다.
    수가무납공인(受價貿納貢人)으로서의 상인층은 대개 자기 자본을 가지지 않은 관청의 하속배(下屬輩)나 무직자들이다. 즉, 공인이라는 명목만으로 생산자를 억압하고 수탈해 염가로 수매 납품(受買納品)해온 자들이다.
    이들은 도고(都庫)를 차리고 이를 통해 관물 조달을 빙자, 강제 매입하기도 했고, 또는 독점 매입하기도 하였다. 필요하면 수시로 관권을 동원했고, 때로는 공인들이 생산자들에게 원료나 공전(工錢)을 선대(先貸)하기도 하였다.
    수가제납공인(受價製納貢人)으로서의 수공업자들은 공계를 조직해 기술자를 고용, 운영하였다. 따라서, 임노동(賃勞動)에 의한 특권적 공장제 수공업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삼남월과화약계인(三南月課火藥契人)의 경우 대부분 생산장(生産場)을 보유한 부민들로서 공장들을 고용해 공사수용품(公私需用品)을 제조, 판매해 온 건실한 수공업자들이었다.
    이들은 대동법이 삼남에 실시되기 이전부터 총약환제조장(銃藥丸製造場)을 설립, 군문(軍門)과 각 도의 군현(郡縣) 및 각 진보(鎭堡) 그리고 사포수(私砲手)에게 널리 생산, 판매하였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우선 삼남의 월과총약환가(月課銃藥丸價)가 대동미에 포함되었다. 이에 훈련도감 등 서울의 각 군문에서는 월과가(月課價)의 차액 수취를 목적으로 총약환 제조업자들을 배제하고 방납권을 탈취하였다. 때문에 총약환 제조업자들은 방납권을 되찾기 위해 진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지칙비(支勅費)와 진휼비(賑恤費) 마련에 허덕이던 상진청(常賑廳)과 결탁, 1685년(숙종 11) 연환(鉛丸)을 상진청 공물로 이속하고 삼남월과연환계(三南月課鉛丸契)를 결성하였다. 1704년에는 화약 또한 상진청 공물로 바꾸고 삼남월과화약계(三南月課火藥契)를 성립시켰다.
    다만, 상진청은 이처럼 삼남월과화약계를 관장한다는 명목만으로 화약가의 절반인 2,000여 석을 수취하고 나머지 2,000여 석 만을 계인에게 지급하고 있었다. 이 때 공가의 절반을 받아 월과 화약을 제조, 납품하는 것으로는 계인들의 이익이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방대한 공사 판로(公私販路)가 열려 있었다.
    즉, 5도 각 진보의 월과 화약 및 사포수의 수용 화약이 모두 그들의 판로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삼남월과화약계인들은 상당한 재부를 축적해갈 수 있었다. 곧 수공업자적 공인들은 공물만이 아니라 그 밖에 시장에 판매할 상품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공물은 원공(元貢)과 별무(別貿)로 구별된다. 원공은 각사공안(各司貢案)에 실린 연례항식(年例恒式)의 공물을 말한다. 별무는 원공만으로는 부족한 경우와 공안에 오르지 않은 새로운 물품이 소요되는 경우, 이런 가용 공물(加用貢物)에 따로 공가를 지급해 납품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원공의 공가는 기본적으로 선혜청에서 지급하였다. 그러나 양서(兩西)와 경기전세조(京畿田稅條)의 공가만은 조선 전기부터의 관례에 따라 호조에서 지급하였다.
    별무에는 유원공별무(有元貢別貿)와 무원공별무(無元貢別貿)가 있었다. 전자는 공안에 실린 양으로 부족해 가용(加用)하는 경우를 가리키고, 후자는 공안에 없는 물품을 매입하는 것을 말한다.
    별무공가는 호조에서 지급하였다. 공가의 지급액은 별무는 물론 원공도 매년 일정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① 원정 공물(元定貢物) 이외의 물종을 새로 추가하는 신설 공물(新設貢物), ② 가정(加定)·감공(减貢), ③ 권감(權减)·복고(復古), ④ 흉년으로 인한 재감(災减), ⑤ 유재계감(遺在計减), ⑥ 인년예수(引年預受)·공가예하(貢價預下) 등에 의한 변화를 들 수 있다. 이 때 앞의 셋은 공안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고 뒤의 셋은 공물 예산집행상의 변동이다.
    장기적인 원공가 상승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가정(加定)이었다. 가정은 중앙 관청에서의 용도가 늘어나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예를 들어 새 궁전이 설립되면, 기인 공물(其人貢物)은 반드시 가정되며 원공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물종도 가정되었다.
    일시적인 가용에 따르는 별무와는 달리, 가정은 공안에 기록되므로 원공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별무는 호조에서 공가를 지급하는 데 비해, 가정은 각 도에 분배되어 선혜각청(宣惠各廳)에서 공가를 지급하였다.
    원공 중 공가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기인공인(其人貢人)이고 가장 적은 것은 유둔주인(油芚主人)이었다. 크던 작던 간에 진배(進拜)하는 각 공(貢)의 총수는 선혜청, 상·진·균청(常賑均廳)을 합해 62공이었다. 즉, 각 사 담당이 35, 공계(貢契) 담당이 24, 시전 담당이 3이었다.
    한편, 별무에 응하는 각 공(貢)의 경우 『만기요람』에서는 유공물아문(有貢物衙門) 각 사 담당과 그 밖의 전(廛)·계(契)의 담당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각 사 유원공별무는 18사, 각 사 무원공별무는 16사였다. 그 밖의 계가 21, 외도고(外都庫)를 포함한 시전이 10이었다.
    시전은 원공보다 별무에 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가정·감공을 할 수 있는 관사 및 공물은 한정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 공물, 즉 무가감각공(無加减各貢)이 훨씬 많았다.
    공가 지급에서 별무는 대개 불리했기 때문에 가정인가 별무인가의 여부는 공인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원공의 경우 공가는 미리 지급되었다. 초기는 4, 5배 내지 10배의 후한 가격이었으므로 공인들은 자기 자본이 없어도 공물무납업을 할 수 있었다.
    원공가가 이처럼 후했던 것은 공인의 생활을 염려해서이기도 했지만, 일차적으로는 물가가 올랐을 때나 필요한 양이 늘었을 때 납품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공인들이 공물아문 내외의 역가(役價)가 지급되지 않는 국역도 부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공가예급에도 물품 마련의 난이도나 수량, 납품 시기 등 사정에 따라 각 공물마다 연조(年條)와 분등(分等)이 정해져 있었다. 연조에는 당년조(當年條)·익년조(翌年條)·재익년조(再翌年條)가 있었다.
    공가의 지급은 대개 2월 이후 시작되었다. 납품 당년에 지급하는 것을 당해조, 납품 시기보다 1년 전에 지급하는 것을 익년조, 2년 전에 지급하는 것을 재익년조라 하였다. 이 연조를 넘어서 미리 받으면 인년예수(引年預受)라고 하였다.
    분등은 1년에 몇 번 무슨 달에 지급하는가에 대한 규정이다. 분등에는 1년에 한 번 지급하는 단등(單等), 두 번 지급하는 양등부터 열 번 지급하는 십등까지 있었으며, 매월 지급하는 것도 있었다.
    별무가는 처음에는 지급 규정이 없었으나 1750년(영조 26) 호조판서 박문수(朴文秀)에 의해 규정이 마련되었다. 각 사 유원공·무원공 별무는 원공의 예를 본받아 어린대장(魚鱗臺帳)이 만들어졌다. 또, 각 사 외전계별무(外廛契別貿)는 무원공별무의 예를 본받아 어린작등(魚鱗作等)되었다.
    분수(分數)에는 단등부터 사등(四等)까지 있었으며, 수량도 적고 간혹 사용하는 것은 수용(需用)에 따라 급가하였다. 별무의 공가는 쌀[米]이 9분의 1을 차지하는 구분마련(九分磨鍊)으로 지급되는 경우가 많았고, 원공에 비해 전(錢)으로 지급되는 비율이 컸다. 유원공별무의 공가는 반드시 납품 후 지급되었다. 무원공별무의 경우에는 경비 부족으로 흔히 뒤에 지급되었다.
    별무공가는 대개 시가에 따라 정해졌기 때문에 1750년(영조 26)의 정식화 이후 원공가의 3분의 2에서 반 가량이었다. 그러나 때로 3분의 1에서 4분의 1이 되어서 공인이 원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인 또는 공물아문은 선혜청으로부터 원공가를 받으면 지방에 내려가 물자를 구입하거나 자체 내에서 제조해 각 관사에 납품하였다. 원공물의 공가를 받고 납품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공폐(貢弊)로 유재(遺在)·가용(加用)이 있었다.
    수가한 뒤 진배하지 않거나, 진배하더라도 호조에서 회감(會減)주 05)하지 않으면 유재가 되었다. 유재가 있으면 다음 공가 지급 때 그 만큼 줄여서 지급되었다.
    유재는 정부에 대한 공인의 부채였으므로 가용과 더불어 큰 폐단이 되었다. 유재 발생 원인은 관청에서의 용도가 감소해 진배량이 적어졌을 경우도 있지만, 더 큰 원인은 공인들이 공가를 인년예수(引年預受)하는 데 있었다.
    인년예수는 대개 물가 등귀 때문에 본전보다 수익이 낮아지는 낙본(落本)의 경우나, 가용이 증대되는 경우에 자금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행해졌다. 이러한 자금난의 경우 인년예수 외에 연조예매(年條預賣)를 할 수도 있었다.
    이는 현대의 어음 할인과 유사한 것이다. 즉, 공가를 받기 전에 공인이 자신의 공물연조(貢物年條)를 싸게 팔아 공가를 받을 달이 오면 그 매득자가 수가(受價)하는 것이다. 인년예수·연조예매는 모두 공인의 궁핍을 초래하는 공폐였다.
    그렇게 생긴 유재는 새로 모집된 공인에게 물려져서 신공인(新貢人)이 구공인(舊貢人)의 유재 때문에 공가를 지급받지 못하거나 줄여서 지급당하였다. 때로는 수십 년 후에까지 호조의 장부에 허위 기록으로 남는 오랜 동안의 유재(遺在)가 되기도 하였다.
    유재는 그밖에 공인이 공물을 납품하더라도 소관아문과 호조 사이의 연락이 잘 되지 않아 호조에서 회감하지 않거나, 실제 납품액보다 적게 회감하는 경우에도 생겼다. 이러한 불회감(不會減)·감수회감(減數會減)의 폐단은 원공보다는 가용별무에 많았다.
    별무의 경우 관청에서의 수요가 늘어 수용급가(隨用給價)주 06)하는 것이 상당히 많았다. 그 결과 진배에 따르는 여러 공폐도 원공의 경우보다 훨씬 많았다. 그 폐단을 막기 위해 각 사에서는 호조에 보고, 관문(關文)주 07)을 받은 뒤 공인에게 진배하도록 하고 있었다.
    호조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직접 공인에게 공문을 내는 것은 과외남징(科外濫徵)의 원인이 되어 금지되었던 것이다. 공인이 입는 큰 공폐들 중의 하나는 각 사에서 규정 외의 잡역에 책립(責立)당하는 것이다. 그 피해는 대개 유공물아문 소속 공인에게 많았다.
    이것은 각 사 안에 잡역인고가(雜役人雇價)로서의 역가(役價)와 잡비에 충당하는 작지(作紙)의 존재에 연유하였다. 따라서 그 규정 범위가 각 사에 따라 애매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폐단이었다.
    종래 공인이 받는 역가는 전세 징수에 따르는 역무(役務) 또는 공물 비납에 따르는 역무에 대한 보수라고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각 사 잡역무(雜役務)에 대한 것이 있었다.
    역가의 기원은 공인의 기원과 같이 대동법 실시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동법은 중앙의 궁이나 관부의 수요품을 공인의 무납제(貿納制)로 바꾸는 동시에, 15세기부터 공인되어 온 여러 신역(身役)의 대립(代立)·방립(防立)주 08) 중의 일부 및 관청의 제역(諸役)도 정식 고용제로 바꾸어서 그 법안에 흡수하였다.
    즉, 각 군현으로부터의 대동세 및 각종 세에 대한 부가세로서의 역가를 징수해 그것을 공인들에게 지급함으로써 역인(役人)이나 역가공물을 진배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경우 공인들 스스로가 역을 거행하는 수도 있었고, 따로 역인을 고립(雇立)하는 수도 있었다.
    공인이 받는 역가는 위에서 설명한 여러 잡역인고립가(雜役人雇立價) 외에 공물 진배에 따르는 역무, 즉 특정한 공물 자체에 대한 역가가 있었다. 그러한 역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각공역가(各貢役價)·채소계역가(菜蔬契役價)·압도계역가(鴨島契役價)·사복시초공역가(司僕寺草貢役價), ② 군자감·광흥창·풍저창의 전세(田稅), 사도시공인(司導寺貢人)의 지배(地排)·배설역가(排設役價), ③ 시문감군계공인(柴門監軍契貢人)·선공감구영선군계공인(繕工監九營繕軍契貢人)·병조제향군계공인(兵曹祭享軍契貢人)·선공감요역계(繕工監徭役契)·거계(車契)·세마계(貰馬契) 등이다.
    ①의 경우는 비교적 공물가와의 구별이 명백하다. 하지만, 순수하게 상인으로서 물자를 무납하는 것이 아니면, 각 공물마다 다소의 공역(貢役)이나 공역(公役)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②의 4개창 공인역가는 모두 국가에서 소요되는 지배(地排)의 배설을 담당하는 데 대한 역가였다.
    지배는 문자 그대로 여러 행사 때 공석(空石)·망석(網席)·고연(篙筵)·초둔(草芚) 등을 땅에 까는 것이다. 특히, 대소 과장(科場), 궐내외 거둥이나 능행(陵幸) 때의 어막차(御幕次) 등에 배설하였다.
    ③의 공인은 대개 별무공가만을 받는 별무공계인들이다. 그들은 물품이 아니라 역군(役軍)을 진배하였다. 선공감·구영선군계공인과 시문감군계공인은 대소 영선을 담당하는 역군이었다.
    공인층은 시대에 따라 여러 요인에 의해 변화해갔다. 그 요인은 다음과 같다. 먼저, 공가를 지급하는 정부에서 공가 재원을 통제해나가려는 공물 정책상의 외적인 면과, 공인권 매매를 통한 공인층의 분해라는 내적인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외적 요인은 공가 재원의 부족으로 정부에서 원공을 억제, 삭감해 별무로 충당하거나 특히 사무(私貿)를 지향하는 등 시가(市價)보다 높은 공가 지불을 기피하는 공가절감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후기로 올수록 공가 자체에서 취할 수 있는 이윤은 줄어들고 있었다. 공가절감 정책은 또한 공인층 분해로 인한 변동을 촉진하였다.
    한편, 매매를 통한 공인권의 집중은 당시 기타 주인권의 집중과 병행된 현상이었다. 그 결과 소유권인 원주인권(原主人權)에 대해 경영권인 분주인권(分主人權)이 분리, 성립되었다.
    공인권 및 기타 주인권의 집중으로 일반 상인자본은 소수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에 공인권에 투자된 자본 또한 부호층의 단순한 재산 증식을 위한 자본으로서뿐만 아니라 상인층의 상업자본의 일부분으로서 기능을 발하였다.
    19세기 말 무렵 주인권은 본래의 권리 내용 면에서 전반적으로 쇠퇴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투자 자본의 상품유통 경제자본으로의 대폭적인 전환 및 확대가 이루어졌다.
    더욱이, 관부상업 체계 하에서 공인은 국역 부담자로서 제도적으로 보장된 이윤을 취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 특수한 이권이 18세기에 현저하게 대두하는 사상층(私商層)의 투자 대상이 되면서 공인의 의미는 상당히 변질되었다.
    또한, 정부에서 시가보다 높은 공가를 보장하지 못하고, 동시에 공인층이 단순한 공가보다 공인권이 보장하는 특권을 겨냥하는 층으로 대체되어 가는 것은 필연적인 상호 선택관계였다.
    정부측의 역부담 요구 및 공가 재원의 고갈이라는 필요 조건과, 상인층의 상업 활동을 보장하는 이권이라는 필요 조건은, 각기 역부담에 상응한 대상인층의 자본과 정부가 보장하는 특권으로써 충족될 수 있는 것이었다.
    18세기 수차에 걸쳐 실시된 금난전권의 폐지와 통공발매 정책(通共發賣政策)은 이와 같은 양자의 새로운 만남을 현실적으로 표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이조공인자본의 연구」(유원동,『아세아연구』 16,1964)

    • 「이조후기의 기인-시탄공물주인의 실태-」(한우근,『아세아학보』 1,1965)

    • 「이조후기 공인의 신분-대동법실시이후 공물청부업자의 기본성격-」(한우근,『학술원논문집』-인문사회과학편 5,1965)

    • 「삼남방물지공고-공인과 생산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송찬식,『진단학보』 37·38,1965)

    • 「조선후기공인에 관한 연구-삼남월과화약계인의 수가제납실태를 중심으로-」(유승주,『역사학보』 71·78·79,1976·1978)

    • 「18·19세기 공물정책의 변화와 공인층의 변동」(오미일,『한국사론』 14,서울대학교,1986)

    • 「18·19세기 외도고·공계의 성립과 그 조직」(김동철,『한국사연구』 55,1986)

    • 「조선후기의 공물무납제-공인연구의 전제작업으로-」(德成外志子,『역사학보』 113,1987)

    • 「조선후기 사찰제조업과 그 생산품의 유통과정」(김호종,『역사교육론집』 10,1987)

    • 「18·19세기 새로운 공인권·전계 창설운동과 난전활동」(오미일,『규장각』 10,1987)

    • 「조선후기 삼공인의 상납실태」(오성,『동아연구』 17,1789)

    • 「보부상의 경영활동에 관한 연구」(이훈섭,『경기대논문집』 20,1989)

    • 「18·19세기 경주인권의 집중화 경향과 도고활동」(김동철,『부대사학』 13,1989)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市廛貢人
    주02
    其人貢物主人
    주03
    권세나 부를 배경으로 한 세력있는 종
    주04
    성격이 포악하거나 사나운 종
    주05
    받을 것과 줄 것을 가감하는 회계 처리
    주06
    용도에 따라 가격을 지급함.
    주07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내리는 허가서
    주08
    백성들이 곡식이나 돈을 미리 내고 역을 면제받던 제도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유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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