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독경업은 시각장애인이 복술과 독경으로 복채나 사례비를 받아 생계를 꾸려 나가는 종교 직업이다. 맹인의 이러한 행위는 고려 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독경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일까지 겸하게 되면서 더욱 성행하였다. 독경은 일반적으로 『옥추경(玉樞經)』을 외웠다. 조선 초부터 맹인의 독경·주축을 관할하는 국가 관서로서 명통시(明通寺)가 있었다. 명통시는 지금의 남산 기슭 신당동 근처에 있었으며, 그 뒤 맹청(盲廳)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나라에는 도교의 교단이나 도사 대신 맹인들이 잡술 행사의 집행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맹인의 매복주축(賣卜呪祝)은 고려시대의 기록에 이미 나타나 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성행하였고 독경으로 양재기복(禳災祈福:신에게 빌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것)하는 일까지 겸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관상감의 명과맹(命課盲)과 명과학(命課學)이 나와 있어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의 복술은 당나라 때 원천강(袁天綱)의 육임과(六壬課:골패 등을 가지고 길흉을 점치는 방법)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점술법에 의거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이후의 명경수(明鏡數)를 최고로 일컬어 왔다고 여겨지나 실제로는 산통을 차고 다니며 청하는 집에 들어가 산가지로 괘를 만들어 길흉을 말해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문과 축원에 수반되는 독경도 종류가 여러 가지였으나 『옥추경(玉樞經)』을 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옥추경』을 읽는 것은 조선시대 초부터 상 · 하 계층에서 함께 성행하였고 특히 질병 치유에 많이 사용되었다.
매복독경(돈 받고 점을 쳐 주거나 경을 읽어 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맹인들 사이에는 엄정한 사 · 제, 존 · 비의 구분이 존재하였는데 그 가장 뚜렷한 사례를 명통시(明通寺)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조선 초부터 맹인의 독경 · 주축을 관할하는 국가 관서로서 태종 이래로 이곳에 맹인을 불러 모아 기우 행사를 집행시키고, 자주 사미(賜米)의 은전이 베풀어졌다.
명통시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5부(部)의 맹인들이 모여 한 차례씩 독경축수하는 행사가 거행되는데,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지위가 높은 자는 채청에 올라가고 낮은 자는 문을 지키며, 여러 겹의 문에 창을 든 수위자를 세워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명통시는 지금의 남산기슭 신당동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 뒤 맹청(盲廳)으로 이름을 바꿨다. 명통시는 관아를 방불하게 하여 이곳의 맹인들은 관원같이 행동하였다. ‘판수’라는 맹인의 명칭도 관서의 우두머리인 판사(判事)에서 나왔다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온 것이다. 고관대작들도 그들에게 ‘해라’는 못하고 중인 대접을 하여 ‘하게’를 했다고 한다. 국왕이 궁궐을 나설 때와 돌아올 때에도 맹인들이 도포를 입고 떼지어 성 밖에 나와 조정관원들과 함께 임금을 보내고 맞았다.
실제로 국가의 제례목록인 『태상제안(太常祭案)』에는 맹인 기우 및 이어시(移御時:임금이 거처를 옮길 때)의 맹인 독경제가 실려 있으며 1756년(영조 21)에 정폐(停廢:폐지)된 뒤에도 제의 순서에는 여전히 그 제목이 실려 있었다. 또한 조선 초부터 맹인들 중에는 장악원(掌樂院)의 악사로 뽑혀 내전의 진연(進宴) 때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세종 때의 음악대가인 박연(朴堧)의 상언(上言)에는 맹인들의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맹인 18명을 뽑아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악기를 연습시켰으나 생계유지가 어려워 쓸 만한 자들은 다 복술 쪽으로 가버렸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때에 이미 맹인들이 매복독경의 행업에 많이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통시의 맹인은 처음에는 삭발을 해서 맹승(盲僧) 또는 선사(禪師)로 불리었으나 불승과는 다르고 불교 · 도교 · 민간신앙을 혼유한 존재였으므로 가뭄이 들면 기우하고 질병이 들면 기양(祈禳)하게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서거정(徐居正)에 의하면 사대부 집안에서도 연초의 기복과 가옥의 건축 및 재액양재에는 반드시 맹인 6, 7인을 고용하여 독경하도록 하였으며, 맹인들은 성수(星宿) · 진군(眞君) 등에 빌며 양재기복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맹인의 양재기복은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특이한 일임을 지적하였다.
복술에 뛰어난 맹인들의 고사는 많은데 이규경(李圭景)에 의하면 홍계관(洪繼寬) · 유은공(劉殷恭) · 합천 맹인(陜川盲人)이 조선시대의 뛰어난 맹인 복술가로 꼽힌다. 홍계관은 한 마리의 암쥐를 보고 다섯 마리의 쥐라고 하여 요언죄(妖言罪)로 몰려 처형당하게 되었으나 쥐의 배를 갈라 보기를 청원하여 갈라 보니 네 마리의 새끼가 들어 있어 신복(神卜)으로 지목되었다.
합천 맹인은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과 명나라의 멸망을 정확하게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 조선 초 복진(卜眞)이라는 맹인은 둔갑술에 능해 지엄한 궁궐의 수비도 뚫고 임금을 뵈었는데 그 죄로 처형을 당했다는 고사도 있다. 결국 우리나라에는 도교의 교단이나 도사가 없는 대신 맹인들이 잡술 행사의 집행을 담당해 내려 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