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조선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쌍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쌍릉
건립 시기
조선 후기(1864년|1878년)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철종|철인왕후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당동, 서삼릉)
내용 요약

예릉(睿陵)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조선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쌍릉이다. 중종의 정릉이 천릉한 옛터에 건립하면서 옛 정릉의 돌거리를 재사용하였다. 동쪽에는 장경왕후의 희릉이 있고, 서쪽에 인종의 효릉이 있어 서삼릉이라 부른다. 사적 정식 명칭은 ‘고양 서삼릉’이다.

정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조선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쌍릉.
건립경위

1863년 12월 8일에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능호를 예릉이라 정하였다. 산릉의 터는 세 번의 간심을 거쳐 희릉(禧陵)의 오른쪽에 주1으로 결정하였다.

이곳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의 초장지(初葬地)로 옛 정릉(靖陵)의 터이다. 산릉 공역을 시작하여 터를 닦는데, 근처에서 주2과 면석(面石) 등이 노출되고 주3 터에서는 주4이 나왔다. 1864년 1월에 공역을 시작하여 4월 7일에 국장 의례를 행하고 10일에 완공되었다.

1878년 5월 12일 창경궁 양화당에서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1878)가 승하하자 능호를 헌릉(憲陵)으로 정하였다. 5월 18일에 예릉의 국내를 초간심한 결과 예릉 언덕의 대왕릉 왼편에 합부하기로 정하여 능호를 그대로 예릉이라 하였다. 6월 19일에 채석을 시작으로 공역이 시작되었으며, 9월 18일에 국장을 행하고 22일에 공역이 완료되었다.

대왕릉이 자리잡은 곳에 왕후의 능침을 쌍릉으로 조성한 것이므로 능상의 돌거리는 주5과 난간석(欄干石)만 추가로 설치하였다. 가정자각(假丁字閣)을 지었다가 삼년상을 마치고 철거를 하였으며, 본래 있던 정자각을 수리 후 합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형태와 특징

예릉은 1544년에 조성되었던 중종의 초장지에 자리를 잡으면서 능상의 돌거리를 재사용하여 돌공사를 줄였다. 조선 전기에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의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기면서 옛 돌거리를 땅에 묻었는데, 정릉을 옮길 때에도 영릉의 전례를 따라 돌거리를 땅에 묻었다.

묻어 두었던 정릉의 돌거리가 잘 남아 있어 주6 3좌, 주7 4좌, 주8 2좌, 혼유석 1좌, 족석(足石) 4좌, 주9 대좌 2좌, 주10 2좌, 주11 2좌를 재사용하게 되었다.

예릉은 19세기에 건립되었으나, 돌거리는 16세기의 모습을 갖고 있어 크기가 장대하고 육중하다. 1800년에 건릉(健陵)을 시작으로 19세기의 문석인은 주12으로 조각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나, 예릉의 문석인은 1544년의 모습대로 복두야대(幞頭也帶)를 착용한 모습이다.

조선왕릉의 능상에는 주13으로 경계를 두어 상 · 중 · 하 3단으로 구성하였으나, 경릉(景陵)과 예릉에는 상 · 하로 2단으로 구성하여 상단에는 주14, 호석과 양석, 봉릉, 혼유석과 망주석이 배치되고, 하단에는 장명등을 중앙에 놓고 양쪽에 문무석인과 석마가 마주보게 배치되었다.

의의 및 평가

예릉은 정릉의 옛 돌거리를 재사용하여 16세기의 특징을 나타내는데, 능상을 2단으로 구성하며 봉릉에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만 두르는 것 등은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따라서 예릉은 19세기의 전체적 배치 구성 속에 16세기 석조각이 세워지면서 조성 시기가 혼재된 사례이다.

예릉의 동쪽에는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의 희릉이 있고, 서쪽에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의 효릉(孝陵)이 있어 서삼릉이라 부른다. 사적 정식 명칭은 ‘고양 서삼릉’이다.

참고문헌

원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철종(哲宗)〕예릉산릉도감의궤(睿陵山陵都監儀軌)』
『〔철인왕후(哲仁王后)〕예릉산릉도감의궤(睿陵山陵都監儀軌)』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Ⅸ』(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위키실록사전(http://dh.aks.ac.kr/sillokwiki)
주석
주1

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자방(子方)을 등지고 오방(午方)을 바라보는 방향. 정북(正北) 방향을 등지고 정남향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우리말샘

주2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3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4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    우리말샘

주5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6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7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8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9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10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11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12

조선 시대에 벼슬아치들이 입던 금관과 조복을 아울러 이르는 말. 문무백관이 조하(朝賀)나 경사 등에 입는 최상급의 공복(公服)이었다.    우리말샘

주13

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우리말샘

주14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신지혜(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연구원)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