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극임(克任), 호는 호은(壺隱) 또는 지재(芝齋). 첨지중추부사 유계장(柳季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유헌(柳軒)이다. 아버지는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유세구(柳世龜)이며, 어머니는 허광(許礦)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사마시에서 생원과 진사에 모두 합격하고 154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지평(持平)·정언(正言) 등을 거쳐 1544년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예조좌랑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전적·병조좌랑을 거쳐, 1546년(명종 1) 호조좌랑·부수찬(副修撰)을 지냈다. 이듬해 지평으로 있으면서 유신들과 함께 윤원로(尹元老)의 탄핵에 동조하여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1548년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성종 때부터 명종 초년에 이르는 각종 내우외환의 진압 전말을 기록한 『무정보감(武定寶鑑)』을 간행하게 되자, 책이 발간되면 민심이 동요될 것을 염려하여 압인(押印)을 거부하였다가 소윤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당하고, 경흥에 유배되었다.
1565년에 소윤 윤원형(尹元衡) 일당이 실각함으로써 1567년 다시 관직에 나가 장령(掌令)·장악원정·사복시정을 지냈다.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면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