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심원(深源). 윤기(尹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흥복(尹興福)이다. 아버지는 오위(五衛)의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윤응열(尹應說)이며, 어머니는 김전(金鈿)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생원이 되고, 163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 가서 검찰부사 이민구(李敏求)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 군량수송의 책임자인 독향사(督餉使)로 호남지방에 갔으나 돌아오기도 전에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되므로, 그해 6월 연원(連原)의 찰방(察訪)에 부임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춘추관기사관(春秋官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병조좌랑·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1640년 결성현감(結城縣監)을 거쳐 칠곡부사(漆谷府使)로 있으면서, 부성(府城)을 신축하고 기계(器械)와 군량미 비축을 위하여 백방으로 심혈을 기울이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문장에도 뛰어나 입시(入侍)할 때마다 문서 기록에 나는 것처럼 빨리하면서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