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문서(文瑞). 군수 이대수(李大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이현영(李顯英)이다. 아버지는 목사 이휘조(李徽祚)이며, 어머니는 광주 이씨(光州李氏)로 군수 이두첨(李斗贍)의 딸이다.
1654년(효종 5)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형조좌랑·교하현감 등을 지냈다. 1662년(현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64년 지평을 거쳐 직강·정언·형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 다시 정언으로 있을 때 특지로 장선징(張善澂)을 병조참판에 발탁시킨 일에 대해 대신(臺臣)들이 논박했으나 왕이 엄한 말로 거절하였다. 이에 소를 올려 “외척에게는 특지로 벼슬을 제수할 수 없고 대각(臺閣)은 꺾어서는 안된다.”며 적극 논쟁하였다.
그 뒤 다시 지평을 거쳐 교리·수찬·부응교·사간·지제교(知製敎)·집의 등을 역임하고, 1670년 안동부사로 나가 기민 구휼에 적극 힘쓴 공으로 옷감을 상으로 받았다. 1673년 동부승지, 이듬해 예조참의, 1681년(숙종 7) 승지, 1685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688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 때 박세채(朴世采)의 파면을 반대한 남구만(南九萬)·여성제(呂聖齊) 등이 북방으로 유배되자, 서인으로서 숙종에게 부당함을 주장하는 소를 올려 호조참의로 체직되었다가 뒤에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 한성부우윤으로 한때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1694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하자, 다시 대사헌이 되어 기사환국 때의 폐비론에 동조한 신하들에 대해 관대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병조 참판 등을 거쳐 형조판서 겸 도총관을 지냈고, 기로소에 들어가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 일종의 정년퇴임같은 것임.)하였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