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공조정랑, 예조정랑,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가(仲嘉)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8년(연산군 4)
사망 연도
미상
본관
덕수(德水, 지금의 황해북도 개풍)
주요 관직
공조정랑|예조정랑|충청도관찰사
정의
조선 전기에, 공조정랑, 예조정랑,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중가(仲嘉). 이추(李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의영(李宜榮)이다. 아버지는 이난(李蘭)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5년(중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4년 동지사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정랑을 거쳐, 1538년 예조정랑으로 별시문과의 시관(試官)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성균관직강을 거쳐 김해부사가 되었는데 이 때 사간원에서 방수(防戍: 국경의 방어)에 경험이 없는 문신을 변방인 김해부사로 임명함을 부당하다고 지적하자, 중종은 김해의 현재 사정은 방어 문제보다 치민(治民)이 더욱 긴요하므로 문사(文士)인 이순형이 적합하다고 하였다.

괴산군수를 거쳐 1542년(중종 37) 청주목사가 되어 식년문과 향시(鄕試)의 상시관(上試官)을 역임하였다. 1548년(명종 3) 효열황후(孝列皇后) 상에 진위사로 명나라에 갔는데, 삼우하(三又河)에서 수레가 전복되어 표문(表文: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 물에 빠져 본국에서 다시 보내 위급을 모면하였다.

1550년 형조참의에 이어 병조참지를 역임하고 1552년 경주부윤이 되었는데 이듬해 혹심한 기근으로 도적이 성행하고 게다가 동헌(東軒)에 화재가 발생, 이에 대한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다시 원주목사를 거쳐 1563년(명종 18) 장례원판결사, 이듬해 충청도관찰사, 1565년 안동부사, 이듬해 한성부우윤을 거쳐 1567년 한성부좌윤에 올랐다. 70세가 넘어 1573년(선조 6)에는 정시문과의 시관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문수홍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