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우참찬, 한성부판윤,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백(重伯)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5년(인조 13)
사망 연도
1692년(숙종 18)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병조좌랑|지평|필선|전라도관찰사|좌부승지|우승지|대사간|예조참판|형조판서|한성부판윤|예조판서
관련 사건
경신대출척|기사환국
정의
조선 후기에, 우참찬, 한성부판윤,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백(重伯). 이구경(李龜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홍장(李弘庄)이다. 아버지는 직강 이익로(李翼老)이며, 어머니는 조빈(趙贇)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62년(현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668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서 지평·정언·필선을 역임하였다. 1674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오삼계(吳三桂)의 난을 보고하였다.

문학·장령 등을 거쳐 정언이 되었는데, 이 해 숙종이 즉위하자 예론(禮論)과 관련해 송시열(宋時烈)을 격론(激論)한 남인 계열의 유생 곽세건(郭世楗)의 유배를 주장하였다.

다시 헌납 때에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해 대왕대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제에 대해, 효종상 때(1659, 乙亥年)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던 송시열 등 서인이 대공설(大功說: 9月喪)을 주장하다 실각하자 효종상 때의 오례(誤禮)를 문책, 당시의 송시열 이하 서인 일파를 엄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부수찬 이인환(李寅煥)이 전일에 송시열을 배척한 곽세건을 유배 보내라던 이우정이 도리어 곽세건의 예론으로 송시열을 배척, 한 사람의 견해가 달포 사이에 갑자기 변해 정서적인 태도가 반복무상하다고 공박하였다.

이후 예론이 있을 때마다 서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또한, 효종상 때 기년설을 주장한 김수흥(金壽興)을 멀리 귀양보내려는 이우정의 주장에 승지 안진(安縝)이 반대하자, 안진의 파직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남인이 득세하자 1675년(숙종 1)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가 인물됨을 들어 반대하자 부임하지 않았다가 좌부승지·우부승지·대사간·우승지 등을 역임하고 부임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을 거쳐 예조참판에 오르고 1677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관원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직첩(職牒: 관직 임명 사령장)을 돌려 받았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승지로 기용되고 이어서 형조판서·우참찬·대사헌·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이듬해 판의금부사·예조판서를 거쳐 수어사(守禦使)가 되어서는, 전에 300호(戶)였던 남한산성에 1,000여 호가 밀집해 있어 유사시에 물자 부족을 염려해 성안의 거주자를 제한하도록 주장하였다. 1692년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당의통략(黨議通略)』
집필자
문수홍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