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군 이간(李幹)의 아들이며, 소경(少卿) 정국검(鄭國儉)의 사위이다.
1202년(신종 5) 12월에 지합문사(知閤門事)로서 경주에서 이비(利備)·패좌(孛佐) 등의 반란이 일어났다.
초토처치병마우도부사(招討處置兵馬右道副使)가 되어 우도사 섭대장군(右道使攝大將軍) 강순의(康純義)와 함께 출정하여 이듬해 2월 기계현(杞溪縣)에서 반란적 1,000여명을 죽이고 250여명을 생포하여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작질(爵秩)을 더 받았다.
이어 전라도안찰사로 있었으며, 한산(漢山)을 지켰는데 명망이 높아져 우상시(右常侍)에 올랐다. 이 때 왕준명(王濬明)이 최충헌(崔忠獻)의 미움을 받아 화를 입고 처형되었다.
아우 정언 왕경의(王景儀)도 연좌되어 귀양갈 때에 왕경의의 친구들이 최충헌을 두려워하여 전송하지 못하였으나, 이유성은 옛 친구로서 사람을 보내어 전송하고 은 30냥을 압송하는 관리에게 주어 곤욕을 덜게 하여주었다. 고종 초에 서경부유수가 되었으나 음률을 즐기고 관기(官妓)에 혹하여 병을 얻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