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성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전라도안찰사, 우상시, 서경부유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215년(고종 2)
주요 관직
지합문사(知閤門事)|초토처치병마우도부사(招討處置兵馬右道副使)|전라도안찰사|우상시(右常侍)|서경부유수
관련 사건
이비의 난|패좌의 난
정의
고려후기 전라도안찰사, 우상시, 서경부유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개설

대장군 이간(李幹)의 아들이며, 소경(少卿) 정국검(鄭國儉)의 사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202년(신종 5) 12월에 지합문사(知閤門事)로서 경주에서 이비(利備)·패좌(孛佐) 등의 반란이 일어났다.

초토처치병마우도부사(招討處置兵馬右道副使)가 되어 우도사 섭대장군(右道使攝大將軍) 강순의(康純義)와 함께 출정하여 이듬해 2월 기계현(杞溪縣)에서 반란적 1,000여명을 죽이고 250여명을 생포하여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작질(爵秩)을 더 받았다.

이어 전라도안찰사로 있었으며, 한산(漢山)을 지켰는데 명망이 높아져 우상시(右常侍)에 올랐다. 이 때 왕준명(王濬明)이 최충헌(崔忠獻)의 미움을 받아 화를 입고 처형되었다.

아우 정언 왕경의(王景儀)도 연좌되어 귀양갈 때에 왕경의의 친구들이 최충헌을 두려워하여 전송하지 못하였으나, 이유성은 옛 친구로서 사람을 보내어 전송하고 은 30냥을 압송하는 관리에게 주어 곤욕을 덜게 하여주었다. 고종 초에 서경부유수가 되었으나 음률을 즐기고 관기(官妓)에 혹하여 병을 얻어 죽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집필자
나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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