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독견은 일제강점기에 「유린」, 「유모」, 「승방비곡」 등을 발표한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다. 본명은 최상덕(崔象德)이고,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상하이(上海) 유학생 출신으로 상하이일일신문에서 교정기사로 활동 중 등단하고, 귀국 후 1920년대 프로문학적 성격의 소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은 1927년 『조선일보』에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연재한 「승방비곡」이다. 대중연재소설 작가의 길을 걷는 동시에 중외일보사, 매일신보사, 평화신문사, 서울신문사 등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최독견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아 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압록강 철교 밑으로 몰래 빠져나와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고학(苦學)으로 혜령전문학원(惠靈專門學院) 중문과를 졸업하였다. 1921년, 상해일일신문신문사(上海日日新聞社) 교정 기사로 활동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중편 『유린(蹂躪)』을 연재하며 등단했다. 1927년 『중외일보』 학예 부장을 거쳐 『매일신보』 근무, 해방 후 조선민주당 기관지 『황해민보』를 주재하고, 1952년에는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후 육군종군작가단 단장으로 전쟁에 참가한다. 1954년에는 『연합신문』의 편집국장, 1959년에는 『세계일보』 편집국장으로 활동했다.
최독견은 연극에도 관여하여 1935년에는 동양극장 초대 지배인을 하였고, 1938년에는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40년에는 조선연극협회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박진(朴珍) · 이서구(李瑞求) 등과 신극단 청춘좌(靑春座) · 호화선(豪華船) 등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작가인 동시에 극장의 관리 및 운영 등을 담당하였는데, 희곡을 쓰거나 각색작을 무대에 올릴 때에는 ‘구월산인’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최독견은 1959년 4월 월간지 『야화』를 창간했다가 필화 사건(筆禍事件)에 휘말리면서, 문단과 언론계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의 카프(KAPF) 열풍과 맞물려 최독견의 초기 작품은 프로문학적 색채를 띤다. 최독견은 생존을 위해 주인 영감과 통정하는 아내를 탓할 수 없는 박서방의 비애를 담은 「유모(乳母)」( 『조선문단』, 1926.6), 「바보의 진노」(『조선문단』, 1927.3)를 비롯해 「푸로 수기(手記)」( 『신민』, 1926.8), 「소작인의 딸」(『신민』, 1926.2), 「한 사람이 차지해야 할 땅」( 『조선농민』, 1926.8), 「책략(策略)」( 『문예시대』, 1926.11), 「고구마」(『신민』, 1927.2) 등 최독견 문학의 뿌리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최독견은 1927년 『조선일보』에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금기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승방비곡(僧房悲曲)」을 연재하면서 이념적 성격에서 탈피해 대중소설가로 변신한다. 그 뒤 작품 경향은 초기의 경향적인 것에서 전환하여, 낭만적이며 감상적인 경향을 보이는 「자색(紫色)봉투」(『신민』, 1928.10), 「향원염사(香園艶史)」(『조선일보』, 1928∼1929), 「연애시장」(『신소설』, 1930.9) 해방 후 「낭만시대」(『조선일보』, 1964.11.∼1965.7.) 등을 발표하였다.
이 밖에도 단편 「괴뢰(傀儡)」( 『白民』, 1950.2)와 전쟁기에 발표한 「양심」( 『신천지』, 1952.5), 「애정무한성(愛情無限城)」(『서울신문』, 1952.7.~1953.2.) 등이 있다.
최독견은 1955년 한국전쟁 종군 작가로 참전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성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