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는 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이다. 작곡가로서 가곡, 동요, 기악곡, 신민요,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썼고, 특히 100여 곡이 넘는 동요와 17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동요 및 가곡 작곡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또한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편집자로서 예술지 『삼광』과 음악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그 외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본관은 남양(南陽)(현, 경기도 화성시).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고, 필명으로 나소운(羅素雲), Y · H생(生), 도례미(都禮美), 도레미생(生), 도뤠미생, ㄷㄹㅁ, 솔 · 파생(生), ㅎㅇㅎ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홍준(洪埻)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 씨이다. 형은 한국에서 안이비인후과 영역을 개척한 홍석후(洪錫厚)이다.
탄생일은 1898년 3월 19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날짜를 음력으로 보아 4월 9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또한 탄생지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라는 여러 기록이 있으나, 자필 이력서에는 경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적혀 있어 현재까지 탄생지에 관한 논란이 있다.
아버지 홍준은 미국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가 설립한 새문안교회에서 1892년에 세례를 받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를 비롯한 외국 선교사의 한글 성서 번역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언더우드의 조선어 선생이기도 하였다. 홍난파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음악을 접했고 이를 통해 서양 음악에 입문하였다.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고 사립 영신 소학교(1905~1910)를 다녔다.
1910년 9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학관 중학과에 입학해 1914년 3월 졸업하였다. 학관에 다니면서 1912년 최초의 전문 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김인식의 지도로 음악 공부에 전념하여 1913년 4월 제2회로 졸업하였다. 다시 같은 해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사현금 전공)에 들어가 1914년 졸업하고, 이후 1915년 1월부터 1917년 12월까지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8년 4월에 도쿄(東京) 우에노(上野)에 있는 관립 동경음악학교(현, 동경예술대학 음악학부) 예과에 입학해서 1919년 3월에 수료하였다. 재학 중이었던 1919년 2월에 예술지 『삼광(三光)』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이 잡지는 재동경 조선 유학생 악우회의 기관지 성격으로 음악 · 미술 · 문학 3개 분야를 다루었으나 음악 분야가 주를 이루었다.
1919년 봄에 귀국하여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다음 해인 1920년 1월까지 기자 생활을 했다. 1919년 10월에는 경성 악우회 제1회 음악 연주회를 개최하여 김영환, 김형준 등과 함께 출연했다. 1920년 1월, 2번째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 본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동경의 사립 일본대학 문과에서 음악 강의를 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그 해 9월부터 11월까지 매일신보에 가정 소설 『허영』을 60회 연재하였고, 1921년 4월~6월 소설 『최후의 악수』를 40회 연재하였다.
1922년 9월에는 민간 음악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립하였다. 주요 사업은 개인 레슨이었지만, 그 외에도 음악회 개최, 악보집 발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음악 영역 확대에 기여했다. 1925년 4월, 연악회의 기관지로 우리나라 최초 음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하였으며, 『세계명작가곡선집』(등사본, 1926), 『조선동요백곡집』 제1편(등사본, 1929), 『조선가요작곡집』 제1집(1933), 『조선동요백곡집』 하편(1933), 『특선가요곡집』(1936) 등을 출판했다.
이 기간 동안 바이올린 연주자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4년 1월 19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였으며, 6월 14일 경성의전(京城醫專) 음악부의 음악회에 출연하였다. 1925년 9월 26일에는 제2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연악회 주최로 개최하였고, 1926년 2월 11일 조선일보사 후원 그랜드 콘서트에서 바이올린 독주를 담당하는 등 다수의 음악회에 출연하였다.
1926년 9월에 사립 동경고등음악학원 선과(選科)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하였다. 동경고등음악학원에 재학 중이던 1927년 동경심포니오케스트라, 1928년 동경신교향악단(東京新交響樂團, NHK교향악단의 전신)에 입단해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1929년 3월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本科)를 졸업하고, 이후 곧바로 귀국하여 같은 해 5월 활동이 중단되었던 연악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9월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주임 교유로 취임하였다.
1931년 7월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 해 9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 연구과에 입학하였고, 1932년 6월에 졸업하여 음악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셔우드 음악학교 재학 중이던 1931년 12월에 미주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단번 266번을 부여 받았다.
1933년 2월에 미국에서 귀국한 후 3월 중앙보육학교 주임 교유직을 물러나고, 4월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 교유를 맡아 1937년 8월까지 일했다. 한편, 홍성유(洪盛裕) · 이영세(李永世)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해서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난파 트리오는 1933년 6월 4일 메이지(明治) 제과홀에서 첫 시연회를 가졌고, 9월 15일 정동 모리스홀에서 제1회 실내악의 밤, 11월 4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연주회를 갖는 등 1936년까지 4년간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1936년 홍성유의 죽음으로 해체되었다. 1934년 6월 일본 빅타(Victor) 축음기 주식회사 경성 지점 음악 주임으로 취임하였고,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출강하였다.
1937년 ‘동우회(수양동우회) 사건’으로 6월 11일에 검거되고, 8월 21일에 송치되어 70여 일의 감옥 생활을 했다. 그 사이 빅타 축음기 주식회사 음악 주임과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 교유를 사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한 후 친일 활동을 하게 되었다. 논문 제출 직후인 11월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38년 6월 사상 전향자들을 회원으로 하는 ‘대동민우회’에 동우회 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가입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7월 『음악만필』을 발간하였다.
1941년 1월 25일 조선음악협회 결성식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월 29일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30일 서울 서대문구 홍파동 2-16번지 자택에서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홍난파는 작곡가로서 가곡, 동요, 기악곡, 신민요,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썼다. 특히 100여 곡이 넘는 동요와 17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동요 및 가곡 작곡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 가곡인 「봉선화」는 원래 바이올린곡으로, 1920년 홍난파의 단편소설집인 『처녀혼』에 「애수」(哀愁)라는 제목으로 처음 실린 곡인데, 후에 가사를 붙여 1925년 출판된 『세계명작가곡집』에 성악곡으로 수록되었다. 「봉선화」 외에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의 신작 시조에 곡을 붙인 『조선가요작곡집』 제1집에 실린 15곡의 가곡과 「사공의 노래」(1932) 등 총 17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한편, 바이올린 연주자로 바이올린 독주곡 「로만스」(1931), 「애수의 조선」(哀愁의 朝鮮, 1931), 「동양풍의 무곡」(東洋風의 舞曲, 1931), 「하야의 성군」(夏夜의 星群, 1931) 등을 작곡 · 출간했다. 그의 유일한 관현악곡으로 「관현악 조곡」(Orchestral Suite)이 있는데, 이 곡은 ‘즉흥곡’, ‘론도’, ‘동양풍의 무곡‘ 등 3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레코드 청취자들을 위한 작품인 신민요, 「방아 찟는 색씨의 노래」(931), 「녹쓴 가락지」(1931), 「압록강」(1934), 유행가 「백마강의 추억」(1935), 「님의 향기」(1935), 영화 「애련송」의 주제가 「서곡」과 「방랑곡」(1938) 등을 작곡했다.
편집자로서 예술지 『삼광』과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악전대요』(1916), 『창가교수법』(1923년 이전), 『음악만필』과 같은 음악 관련 서적을 출판하였고, 그 외 다수의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또한 1921년 첫 창작소설집인 『처녀혼』을 발표하였고, 번역서로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원작의 『가난한 사람들』을 번역한 『청춘의 사랑』(1923)과 에밀 졸라(Emile Zola) 원작의 『나나』(1924) 등을 출간하였다. 이외에도 신문과 잡지에 다수의 글과 평론을 발표하였다.
1965년 10월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