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흥창(可興倉)은 조선시대 한강 수계(水系)의 대표적인 조창으로서, 조선 전기에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세곡을 보관한 다음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운반하는 조창이었다. 가흥창에는 세곡을 운반하는 선박인 수참선(水站船)과 수참선에 승선하는 수부(水夫)가 소속되어 있고, 이를 중앙에서 파견한 좌도수운판관(左道水運判官)이 모두 관할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 세곡의 대일 외교 비용 지출, 경상도 북부 지역 군현 세곡의 작전(作錢), 경상도 남해안의 3조창 신설 등을 계기로 세곡의 징수 범위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 결과 충주 가흥창의 책임자인 좌도수운판관이 혁파되는 등 조선 후기 가흥창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 충주에는 고려시대 조창인 덕흥창(德興倉)을 계승한 경원창(慶源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1403년(태종 3) 경상도의 3조창이 폐지됨에 따라 경상도의 세곡이 모두 충주에 집적되면서 경원창의 기능과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그에 따라 1411년(태종 11) 조선 정부는 경원창에 200여 칸의 창고를 새로 건립하고, 현재 충청북도 지역인 충청좌도의 세곡과 경상도의 세곡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1461년(세종 7) 경원창이 대화재로 소실되고, 창고 앞 강물에 여울이 심하다는 이유로 1465년(세조 11) 현 충주 가금면 가흥리로 창고를 이전하였다. 가흥리로 이전된 이후에는 가흥창(可興倉)으로 이름을 바꿔 불렀다. 가흥창이 신설된 초기에는 별도의 창고 건물이 없었다. 그러다 1521년(중종 16)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70여 칸의 창고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는 서울과 지방의 선박을 관장하는 관청인 전함사(典艦司)에 수운판관(水運判官) 2명이 소속되었다. 2명의 수운판관은 좌도(左道)수운판관과 우도(右道)수운판관 각 1명씩으로, 한강 수계에 있는 가흥창은 좌도수운판관의 관할 구역인 좌수참(左水站)의 중심 거점이었다. 좌도수운판관은 종5품의 관직으로 충주 가흥창을 비롯하여 원주의 흥원창(興原倉),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 등의 한강 수계에 있는 조창을 관할하였다. 조선 전기 충주 가흥창을 비롯하여 흥원창, 소양강창 등 좌도 수운에는 총 51척의 선박 즉, 수참선(水站船)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19세기 초반에 작성된 『만기요람』에는 가흥창 수참선의 숫자가 16척, 19세기 중엽에 작성된 『대전회통』에는 14~15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가흥창에서 거두는 세곡량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수참선에는 1척마다 사공(沙工) 1명과 격군(格軍) 3명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사공과 격군에게는 1인마다 봉족(奉足) 수부(水夫) 2명을 배치하여 각각 신역(身役)에 따른 조(租) 3석(石)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조선 전기 가흥창의 징수 구역, 즉 속읍(屬邑)은 충주, 단양, 청풍, 괴산, 연풍, 제천, 영춘, 음성, 옥천, 영동, 황간, 청산, 보은, 청안, 진천 등 충청좌도 15읍과 경상도 모든 군현이었다.
조선 후기 가흥창의 기능과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다. 그것은 세곡을 동전으로 대납하는 작전 제도(作錢制度)가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17세기 직후 가흥창은 충청좌도와 경상도 18읍의 세곡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 경상도 상주, 안동, 예천, 문경, 용궁, 함창, 비안 등 조령(鳥嶺) 7읍, 1755년(영조 31)에는 봉화, 순흥, 영천, 예안, 풍기 등 죽령(竹嶺) 5읍의 세곡이 각각 작전되면서 가흥창의 세곡량은 대폭 줄어들었다. 심지어 1801년(순조 1), 1805년(순조 5), 1822년(순조 22), 1828년(순조 28)에는 각각 충청도 영춘, 연풍, 단양, 제천 등의 대동세가 모두 동전으로 대납되었다. 이로써 19세기 중엽 가흥창의 속읍은 6개 군현으로 줄어들었다. 이와 같이 가흥창의 기능이 축소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1779년(정조 3)에는 좌도수운판관이 폐지되었다. 수운판관이 혁파되면서 충추목사가 도차사원(都差使員)이 되어 가흥창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18세기 중엽 이후 세곡의 작전제가 일반화되면서 수운(水運)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19세기 후반이 되면 조세 개혁으로 조운 제도는 폐지의 운명을 맞게 되면서 가흥창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충주 가흥창은 조선시대 한강 수계의 대표적인 조창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충청좌도를 포함하여 경상도의 전세까지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였기 때문에, 국가 재정 운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조창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경상도 지역에 별도의 조창이 신설되고, 경상도 북부 지역과 충청도 남한강 상류 지역의 군현에서 세곡을 작전(作錢)하면서 그 기능은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흥창은 조선 왕조 내내 남한강 중상류의 세곡 물류 유통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