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참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한강 수계(水系)의 포구에 위치하여 조창의 기능과 목재 등 각종 물품의 운송, 사객(使客)의 이동 보조 등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인원과 선박 등을 배치한 시설.
정의
조선시대 한강 수계(水系)의 포구에 위치하여 조창의 기능과 목재 등 각종 물품의 운송, 사객(使客)의 이동 보조 등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인원과 선박 등을 배치한 시설.
개설

수참(水站)은 13세기 후반 중국 강남 지역과 고려 사이 곡물 운송의 편의를 위하여 탐라와 압록강 사이의 바닷길을 따라 설치한 수역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수참은 한강 수계와 예성강 수계의 포구에 설치되어 조창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인원과 선박 등이 배치된 시설을 지칭한다. 조창의 기능 외에 부가적으로 화물 운송 기능, 그리고 사객의 이동을 보조하는 기능 등도 수행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세곡의 관선(官船) 조운 대신에 민간 선박에 의한 임운(賃運)의 방식이 확대되고, 세곡의 납부가 면포나 동전의 납부로 대체되는 지역이 늘어나면서 수참의 기능이나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다.

내용
  1. 설치 연혁

고려 말기인 1390년(공양왕 2) 고려 정부는 정몽주(鄭夢周)의 건의로 수참을 설치하고 조운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당시의 수참은 한강의 주요 나루에 설치되었는데, 창고와 선박, 인원을 배정하고 주변 지역의 조세를 수납하여 경창(京倉)으로 실어 나르는 조창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수참은 당시에 왜구의 침략으로 인하여 연안 해로를 통한 조운의 운송에 애로를 겪자, 한강 등의 내륙 하천 수운의 기능을 강화하고자 고안된 제도이다. 한때 심덕부(沈德符)가 폐지하자고 건의한 동서체운소수참(東西遞運所水站)이 당시 정몽주의 건의로 설치되었던 수참으로 여겨진다.

한편 고려는 그 이전에도 수참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었다. 1293년(충렬왕 19) 탐라에서 압록강까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11곳의 수역(水驛)을 설치했다고 한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추자도에 수참의 옛 유적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추자도의 이 수참이 당시 설치했던 11곳의 수역 중 1곳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11곳의 수역은 10년이 채 못되어 혁폐되었다. 이 수역들은 고려 정부의 자발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元) 정부의 요구에 의해 중국 강남 지역에서 한반도나 요양(遼陽) 방면으로의 미곡(米穀) 운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 말기 정몽주의 건의로 설치되었던 수참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운영되었다. 한양 천도 직후인 1395년(태조 4)에는 수로전운소완호별감(水路轉運所完護別監)이라는 관직을 두고 한양의 용산강(龍山江)에서 충주의 연천(淵遷)까지 7곳을 소속시켰다. 이 7곳은 수참에 해당할 것이나 그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한강 수계에서 수참이 위치한 고을로 확인되는 곳은 충주와 원주, 천녕, 양근, 광주, 과천, 금천(衿川) 등 6곳이 있었으며, 그 중 좌도(左道)의 수참으로는 과천 흑석참(黑石站)에서 충주 금천참(金遷站)까지 6개의 수참이 있었다. 금천의 수참은 양화도(楊花渡)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좌도는 경기좌도를 지칭하며 한성을 기준으로 한강의 상류 지역을 의미한다. 경기좌도 소속의 수참은 경기도 외에도 충청도 충주와 강원도 원주에도 위치하였다. 우도는 경기우도를 지칭하며 한강 하류와 황해도의 예성강 수계 지역을 관할 범위로 두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좌도 소속으로 광주 진촌진(津村津), 양근 서심탄(西深灘), 과천 흑석진(黑石津), 천녕 이포(梨浦) 등 4곳의 수참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외 좌도 소속 수참 2곳은 원주의 흥원창(興元倉 혹은 興原倉) 지역과 충주 금천참이다. 원주 흥원창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흥원창이 조창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흥원창 지역에 있던 수참의 명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충주 금천(金遷)은 연천(淵遷)이라고도 불렀으며, 고려시대 이래 덕흥창(德興倉)이 운영되었고 1403년(태종 3)에는 경원창(慶源倉)이 신설되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 진촌진의 수참을 하진참(下津站)으로 기록하고 있다. 1465년(세조 11)에는 덕흥창과 경원창을 대신하여 가흥창(可興倉)이 신설되었는데, 가흥창의 포구에는 가흥참이 위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천참과 가흥참이 모두 기재되었으나, 덕흥창과 경원창이 폐쇄된 이후 금천참도 그 기능을 상실하고 폐지되었다. 15세기 중반에는 북한강 수계에 춘천 소양강창(昭陽江倉)이 조창으로 신설되었는데, 이 역시 좌도 소속의 수참으로 관리되었다.

우도의 경우, 황해도 배천의 금곡포(金谷浦)와 강음의 조읍포(助邑浦)가 수참이 있었던 곳이다. 두 포구에는 조창이 설치되어 금곡포창에서는 해주 등 황해도 서부와 남부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였으며, 조읍포창에서는 황주와 평주 등 황해도 중부와 동부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금곡포창과 조읍포창의 세곡 수납과 운송은 우도의 관할 임무였다. 한강 수계에서는 금천(衿川)의 양화도에 있던 수참이 우도의 관할 범위였을 것으로 여겨지나 분명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 외에 한강 하류 지역에서 수참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다.

  1. 역할과 조직

수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주변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 즉 조창과 조운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다만 세곡의 운송은 특정한 시기에만 진행된 업무였기 때문에, 조운을 시행하지 않을 때에는 다른 임무도 수행하였다. 와요(瓦窯) 등에서 사용할 목재를 운반한다든지, 한강 수운을 통해 한성을 왕래하는 일본인들의 이동을 보조하는 역할 등을 행하였다. 이와 같은 수참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수참에는 일정 규모의 인원과 선박이 배치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좌도 관할 하의 광주 진촌진, 양근 서심판, 과천 흑석진, 천녕 이포 등 4개 수참에 15척의 수참선(水站船)을 두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경국대전』에 따르면 경기좌도에 소속된 수참선이 51척, 경기우도의 수참선은 20척이 있었다고 하며, 인원의 경우, 좌도에는 수부(水夫) 306명, 우도에는 292명이 있어 두 개의 번으로 나누어 교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수운(水運)을 담당하는 노비도 20명의 정원이 규정되었는데, 20명은 각 수참마다 배정된 인원으로 여겨진다.

수참을 관할하는 관리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과 우도수참전운판관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개창 직후에 있었던 수로전운소완호별감을 계승한 관직이다. 좌도수참전운판관은 광진승(廣津丞)을 겸임하였고, 우도수참전운판관은 벽란도승(碧瀾渡丞)을 겸임하였다. 이후 수참전운판관은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개칭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수운판관 2명이 전함사(典艦司) 소속의 종5품 무록관(無祿官)으로 기록되어 있다. 각각 좌도와 우도를 관장하였을 것이다. 수운판관은 수참에서의 조세 수납과 조운을 감독하고, 수참에 소속된 인원과 선박의 관리를 담당하였다.

변천과 현황

조선 후기에는 세곡의 관선 조운 대신에 민간 선박에 의한 임운의 방식이 확대되고, 몇몇 지역에서는 세곡의 납부가 면포나 동전의 납부로 대체되면서 조창과 조운의 중요성이 줄어들게 되었고, 수참의 기능이나 역할도 축소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수참으로 관리되던 곳들 중 대부분은 더이상 수참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자료인 『만기요람』에 따르면, 좌수참, 즉 좌도 소속의 수참으로는 충청도 충주의 가흥창만을 명기하였으며, 우수참으로는 금곡창(금곡포창)이 있었으나 1713년(숙종 39)에 조창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금곡창에 소속되었던 수참선 16척은 충청도와 강원도 지역의 목재 운반선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가흥창에 세곡을 납부하는 고을의 숫자 또한 조선 전기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한편 『경국대전』에 기록된 조창인 좌도 소속의 원주 흥원창과 춘천 소양강창, 우도 소속의 강음 조읍포창 등은 금곡창보다도 먼저 조창 기능을 상실하여, 배치된 선박과 인원이 소멸한지 오래되었다. 조선 전기에 수참으로서 관리되었던 광주 진촌진이나, 양근 서심탄, 과천 흑석진, 천녕 이포 등도 더이상 수참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았다.

수참의 중요성이 약화되면서 수운판관의 위상에도 변동이 있었다. 우도수운판관은 금곡포창이 폐지되었던 1713년에 이미 혁파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779년(정조 3)에는 좌도수운판관도 혁파하고 충주 목사를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 삼아 좌수참, 즉 가흥창의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가흥창에 세곡을 납부하는 충청도 6개 고을 중 충주를 제외한 나머지 5개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가흥창의 조세 수납과 운송의 일을 교대로 직접 관장하게 하였다.

19세기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에는 조선 후기의 마지막 수참이라 할 수 있는 가흥창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가흥창의 조운선인 수참선(水站船)이 14~15척이었으며, 매 선박마다 사공(沙工) 1명과 격군(格軍) 3명 또 그들 1인마다 봉족(奉足) 수부(水夫) 2명을 배치하여 각각 신역(身役)에 따른 조(租) 3석(石)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한편 『만기요람』에는 가흥창 수참선의 숫자가 16척으로 기재되어 있다. 19세기 이후 조세의 금납화가 일반화되면서 세곡 운송의 필요성이 점차 감소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조운제도는 사실상 폐지의 운명을 맞게 되었으며, 가흥창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수참의 제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에 운영되었던 수참은 각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납부하는 시설인 조창의 범주에 포함되는 시설이다. 다만 한강과 예성강 수운을 통하여 세곡을 운송하는 시설이라는 점에서, 해안 포구에 위치한 조창과 구분하기 위하여 수참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또한 수참은 조창의 기능 외에 목재와 같은 화물 운송이나 사객의 이동을 보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민간 선박을 통한 임운의 방식이 확대되고, 세곡의 납부가 면포나 동전의 납부로 대체되는 지역이 늘어나면서 수참의 존재 필요성은 크게 쇠퇴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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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世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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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만기요람(萬機要覽)』
『대전회통(大典會通)』
『한국 전근대 교통사』(고동환, 들녘, 2015)
『한국사: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24(국사편찬위원회 편, 탐구당, 1994)
「여말 선초 조운제도의 연속과 변화」(문경호, 『지방사와 지방문화』 17-1, 역사문화학회, 2014)
「1293~1303년 고려 서해안 '원(元) 수역(水驛)'의 치폐(置廢)와 그 의미」(이강한, 『한국중세사연구』 33, 한국중세사연구회, 2012)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원(元)의 개입과 그 의미」(정요근, 『역사와 현실』 64, 한국역사연구회, 2007)
「조선시대 한강의 수운(水運)과 경제적 측면 고찰」(박경룡, 『서울문화연구』 2, 서울문화사학회, 1999)
「高麗におけゐ元の站赤」(森平雅彦, 『史淵』 141, 九州大學 人文科學硏究院, 2004)
「李朝初期の漢江の水站制度について」(六反田豊, 『史淵』 128, 九州大學 文學部, 1993)
집필자
정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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