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江倉)은 곡물을 보관하기 위하여 강이나 하천 인근에 설치한 창고를 의미한다. 곡물은 무게가 많이 나가고, 부피가 크기 때문에 다량의 곡물은 보통 선박을 통해 운송되었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 왕조는 수로 교통의 중심지에 강창을 설치하고, 곡물을 보관하고 유통했다. 일반적으로 강창은 국가가 세곡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를 뜻하지만, 지방 군현에서도 세곡을 보관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강변에 설치한 창고도 강창이라 불렀다. 또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곡, 유사시 군사들의 식량인 군량미 등을 보관하기 위한 강창도 존재하였다.
강창(江倉)은 어휘 그대로 강에 있는 창고로 바닷가에 설치된 해창(海倉)과 대비되는 창고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강 인근에 창고를 설치한 이유는 수로 교통을 통해 물자를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강창은 중앙 정부는 물론이고 지방 군현에서도 자발적으로 설치한 경우가 있었다. 그 목적은 대개 세곡(稅穀) 운송, 진휼곡 운영, 군량미 보관, 환곡 운영 등이었다. 따라서 강창에 보관된 물품은 보통 쌀, 콩 등의 곡물이 중심을 이루었다. 우리나라는 육로 운송이 발달하지 않아 일찍부터 수로가 운송로로 중요시되었다. 운송 화물은 세곡이 중심이었고, 그것들은 내륙의 주요 하천이나, 연해안 부근에 집적되어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운송되었다. 그러므로 연해안 또는 강 인근에 창고를 설치하여 곡물을 보관, 수송하였다.
강창은 중앙 정부와 지방 군현의 다양한 목적 아래 설치되었다. 먼저 조선시대 중앙 여러 기관에서는 한강 변에 다수의 강창을 설치하였다. 그중 서강과 용산에 설치된 호조의 광흥창과 풍저창이 대표적인 강창이다. 이 창고들은 정식 명칭이 있었음에도 한강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창(江倉)이라 불렀다. 이외에도 선혜청, 진휼청, 총융청 등도 한강 변에 각각 강창을 설치하고, 진휼곡과 환곡을 보관하였다.
강창의 대부분은 지방 군현에서 수취한 세곡을 운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남한강 중상류인 충주와 원주에 각각 덕흥창(德興倉)과 흥원창(興原倉)을 설치하였다. 이들 강창은 국가에서 설치한 조창으로 남한강 유역 일대의 세곡을 수납, 운송하고 있었다. 강창의 기능은 조선시대에 조운제(漕運制)가 정비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충주 가흥창, 원주 흥원창, 춘천 소양강창, 배천 금곡포창, 강음 조읍포창 등 5곳에 강창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강창이 있던 한강과 예성강을 기준으로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각각 구분하고, 좌도의 강창은 좌도수운판관(左道水運判官)이, 우도의 강창은 우도수운판관(右道水運判官)이 관할하도록 했다. 조창으로서의 강창들은 충주 가흥창을 제외하고 대부분 17세기 이후에 폐지되었다. 충주의 가흥창도 17세기 이후로 기능이 약화되었으나, 19세기까지 창고는 계속 설치되어 있었다.
한편 국가가 설치한 조창으로서의 강창은 아니지만 조창의 기능을 동일하게 수행하던 강창이 있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조창이 있던 곳에는 '조(漕)'라고 표기해 두었으나, 지방 군현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한 세곡 창고는 ‘강(江)’ 또는 '해(海)'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때 '강(江)'이 강창(江倉)이다. 충청도로 예를 들면 공주의 분포(汾浦)와 시진포(市津浦), 연산의 사진포(沙津浦), 부여의 백마강(白馬江), 노성의 오산포(烏山浦), 임천의 남당포(南塘浦)와 칠산포(七山浦), 한산의 와포(瓦浦)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포구에 설치된 강창으로 각 군현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하였다. 다만, 이 창고에는 조운선과 조군이 배치되지 않은 까닭에 서울의 경강선인들이 내려와서 세곡을 운송하였고, 정조 대 주교사(舟橋司)가 설치된 이후로는 주교선(舟橋船)이 금강 일대의 세곡을 운송하였다.
세곡 창고인 강창과 달리 군량미나 진휼곡을 보관하던 강창도 존재하였다. 이를테면 충주를 독진(獨鎭)으로 만들기 위해 설치한 양진창, 제주도 기근을 구제하기 위하여 전라도 임피에 설치한 나리포창 등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겠다.
강창은 수로 교통의 거점에 설치된 곡물 창고이다. 곡물은 부피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갔기 때문에 선박을 통해 유통되었다. 따라서 강창이 설치된 곳은 전근대 교통의 중심지이자, 물품 교역의 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