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경상남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던 갈천(葛川) 임훈(林薰)이 거처하던 곳으로, 1507년(중종 2)에 세워졌다.
효행이 지극하고 학문이 높은 임훈이 살았던 마을에 정려각이 세워졌고, 임씨 동족부락으로 수백 년의 역사적인 유래를 가졌으며, 마을 이름도 갈계리라 부르고 있다. 건물구성은 안채 · 사랑채 · 가묘 · 장판각(藏板閣) · 솟을대문 등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칸의 맞배지붕이고, 평면구성은 중앙에 대청마루, 양측에 방을 각각 두고 부엌 1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문은 외여닫이 띠살문이고, 대청의 뒷면은 벽장으로 폐쇄되고 정면은 개방되었다. 대청 전면의 기둥 2개만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이고 중앙에 대청마루, 양쪽에 각각 방 1칸씩을 배치하였다. 방과 대청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대청의 후면은 벽과 쌍여닫이문을 달았으며 전면은 개방되었다.
사랑채 전면에 배치된 대문간채는 맞배지붕의 솟을대문으로 중앙에 출입문 양측에 각각 방 한 개씩을 두었다. 임훈의 덕행을 추모하여 나라에서 정려문(旌閭門)을 내렸으며 지금 사용하는 대문에 합문(閤門)해 두었다. 이 정려문의 특징은 주춧돌이 거북모양으로 조각되었고, 정려문 윗부분에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는 내용의 정려패가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