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조(景照)의 출신 배경에 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고려 무신 집권기 때 유가업 승려로서 활동하였으며, 승계(僧階)는 삼중대사(三重大師)에까지 올랐다. 자(字)는 공공(空空)이며 경조는 법명이다. 성격이 얽매이지 않아 늘 소년과 어울려 다녔으며, 시에 능해 시승(詩僧)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불도(佛道)에 조예가 깊어 법왕이라 불렸다. 그의 명성을 들은 송나라 선종 고승 조파(祖播)가 사신 구양백호(歐陽伯虎)의 편을 이용하여 반죽(斑竹)으로 만든 지팡이 한 개와 까맣게 옻칠한 바리때 다섯 개, 황적색 염주 한 꿰미를 선물로 보냈고, 겸하여 시를 지어 부쳤다. 경조는 자신의 거처를 ‘토각암(兎角庵)’이라 하였는데, ‘뿔달린 토끼’란 본래 없는 것을 있다고 고집한다는 불경의 비유로서 스스로를 낮추는 표현이다. 경조가 토각암에 머물며 당대 문인 이규보 등과 교유하였던 사실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전한다. 한편, 최자가 쓴 『보한집(補閑集)』에는 경조가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돌미륵을 찬양하며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