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사(彰聖寺)는 수원 장안구 상광교동 48번지(상광교 버스종점 주변)에 있었던 사찰인데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고려 말의 문인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이 1340년대에 창성사에 와서 시를 읊었다는 내용이 가장 빠른 사찰 관련 기록이다. 이 시에 의하면 “불당 은행나무 옛날 그대로 있는데, 이 사원은 말끔히 수리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절의 명물인 은행나무가 고려말 당시에도 있었으며 창성사 전각이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의 마지막 화엄종계 국사인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 13071382)가 말년에 창성사를 화엄종의 본산으로 삼고자 하였다. 조선 초 태종의 불교개혁을 통해 유가종으로 이속되었으며, 세종대인 1446년(세종 28) 무렵에는 김겸광(金謙光)·강희맹(姜希盟) 등의 유생들이 독서하였던 사찰이었는데 창성사(昌盛寺)라고도 불렸던 듯하다. 성종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1819세기에 편찬된 지리지나 지도류 등에도 그 이름이 실려 있다. 조선 후기 문인 신경준(申景濬)의 『가람고(伽藍考)』나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 사찰조에 의하면, 창성사는 일시적으로 창선사(彰善寺)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1791년(정조 15)에 편찬된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 사찰조의 기록에 의하면 “창선사는 광교산에 있으며 지금은 폐사되어 다시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광교산에 있는데 옛날에 폐사되어 지금 보수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1800년에 제작된 『동국여도(東國輿圖) 』의 수원부지도(고려대 박물관 소장)에는 창성사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에 의하면 창성사가 전소되어 폐사되었다고 한다. 창성사는 고려말 근기 지방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데, 절터의 위치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진각국사 천희의 생애를 기록한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는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1965년 원래 있었던 창성사지를 떠나 매향동 13-1번지의 현재 자리로 옮겨 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