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신문왕(681692) 때 활동했던 부설(浮雪)이 아들 등운(登雲)을 위해 변산 제2봉인 쌍선봉의 동쪽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청허휴정(淸虛休靜)의 전법제자인 영허해일(映虛海一, 15411609)대사가 남긴 「부설전(浮雪傳)」에 의하면 부설은 변산의 한 암자에서 수행하다가 강원도 오대산에 가서 정진하고자 길을 떠났는데, 밤이 되어 구무원(仇無寃)의 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 때 구무원의 딸 묘화(妙華)가 부설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 뒤 내외는 변산으로 가서 부설암(浮雪庵)과 묘적암(妙寂庵)을 짓고 수행했으며, 딸을 위해 월명암(月明庵)을, 아들을 위해 등운암(登雲庵)을 지었다고 한다. 조선 중종대 기묘명현 기준(奇遵, 1492∼1521)의 문집 『덕양유고(德陽遺稿)』에 수록된 ‘등운암(登雲菴)’이란 시가 있으며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최명룡 묘갈명(崔命龍 墓碣銘)」에 의하면 이곳에서 불교를 공부하던 유학자 여윤(汝允) 최몽룡(崔命龍, 15671621)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 4대 문장가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문집 『월사집(月沙集)』제18권에는 “등운(登雲)은 변산의 절 이름이다”라는 기록이 있고, 구치용(具致用, 1590∼1666)의 문집 『우교당유고(于郊堂遺稿)』제3권에는 ‘야등운암사(夜登雲巖寺)’라는 시문이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與地誌)』에 의하면 “월명암(月明庵)은 변산 월정봉(月精峯)에 있는데, 지세가 기이하고 밝아서 왕재(王在) · 의상(義湘) · 원효(元曉) · 덕성(德成)과 함께 이름난 절이다. 그 곁에 또 등운암(登雲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월명암 위쪽에 있었던 등운암의 폐사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 중국의 방거사(龐居士)와 더불어 세계 불교 3대 거사로 알려진 부설거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