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응(戒膺)의 호는 태백산인(太白山人)이며 시호는 무애지국사(無碍智國師)이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화엄종을 계승한 수제자이다. 계응은 어려서부터 승사(僧舍)에서 독서하였는데, 의천이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법기(法器)로 삼을만하다 여겨 출가시켰다고 전한다. 그 후 의천의 문하에서 큰 깨우침을 얻었다. 개경을 중심으로 불교를 널리 홍포하였고 40여 년간 국왕의 존경을 받으며 자문에 응하였다. 스승 의천이 중앙 불교계에서 물러나자 계응은 경북 의성 태백산에 각화사(覺華寺)를 창건하였는데, 전국에서 천백여 명의 승려 및 학자들이 몰려들어 법해용문(法海龍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때 개경 흥왕사의 승려 지승(智勝)도 계응의 문하에 들어와 제자가 되었다. 계응은 동문인 교융(敎雄, 1079~1153)과 함께 각화사에 주석하였고 의천의 뒤를 이어 화엄종을 대표하였다. 그의 제자 석윤(釋胤)은 각화사 인근에 용수사(龍壽寺)를 개창하였다.
계응은 시와 문장에도 능한 승려로 알려져 있다. 『파한집(破閑集)』에는 그가 강원도 홍천의 한송정(寒松亭)을 방문했을 때의 감회를 적은 시가 한 편 수록되어 있고, 『동문선(東文選)』에도 두 편의 시 「송지승(送智勝)」과 「식당명병서(食堂銘幷序)」가 전하고 있다.
예종은 계응을 여러 번 왕궁에 초청하여 불교의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이후 사양하며 시를 남기고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인종 때는 숙종의 아들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儼)의 초청으로 개경의 홍교원(弘敎院)에 와서 160인의 학도들과 37일 동안 화엄 법회를 개최하며 대각국사 의천의 화엄 종풍을 드높였다. 계응은 인종 때 무애지국사(無㝵智國師)로 추증되었는데, 문인 박인범(朴仁範)이 진영에 찬문을 지은 것이 『동문선』에 전한다. 고려 후기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하였던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의 교서에 의하면 의천을 계승한 대표적 제자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과 함께 계응이 거론되고 있으며, 고려 건국 이후 300여 년 간 고려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