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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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개념
예술적 표현을 통하여 사상적 경향이나 자기주장을 드러내 대중을 유도하고자 하는 연극.
목차
정의
예술적 표현을 통하여 사상적 경향이나 자기주장을 드러내 대중을 유도하고자 하는 연극.
내용

우리 나라에서는 경향극의 개념이 곧 이데올로기연극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롤레타리아문예가 조직적으로 발생되기 전단계의 짙은 사회성을 띤 극으로서, 미조직 · 미자각 상태의 ‘프로극’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1920년대 초의 경향파 문인이나 연극인들 대부분이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결성 이후 프롤레타리아문학과 연극으로 발전해갔으므로, 넓은 의미의 경향극은 프로극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향극과 프로극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이다.

① 경향극 시기(1920년대 전반기)는 조직적인 연극운동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② 경향극 시기는 계급의식에 근거하기는 하였지만, 계급적인 각성이나 자각이 미약하였다. 그 계급의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무산계급에 대한 동정심으로서, 범휴머니즘사상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③ 본격적 프로극과 경향극은 그 작품성향에 큰 차이가 있다. 경향극은 단순히 빈궁을 주제로 하거나 소박한 반항극으로, 그 빈궁의 사회적 · 계급적 원인이 무시되었고, 빈궁에 대한 반항이 혁명적인 기초 위에 서 있지 않은 자연발생적인 개인적 동기나 감정에 기초되어 있다.

그 반면 본격적 프롤레타리아극은 그런 빈궁의 사회적 · 계급적 원인을 추구하고, 그에 대한 반항의 혁명적인 근거를 명백히 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향극은 조명희(趙明熙)가 희곡 <김영일의 사(死)>를 쓴 1921년부터 시작되었고, 프로극으로 발전되어 1930년대 초반 경향극단활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경향극은 연극운동의 성격보다는 극단운동이 활발하였다. 1922년에 발족된 염군(焰群)을 출발로 해서 1925년 이후 경향성을 띤 극단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이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경향극단 염군도 일제의 탄압으로 단 한 번의 공연도 하지 못한 채 흩어졌고, 1925년 11월에 조직된 조선프로극협회도 마찬가지였다.

1927년초 김기진(金基鎭) · 박영희(朴英熙) · 조명희 등 문인들이 조직하였던 불개미극단도 ‘극을 통한 민중의 감정과 지능의 유도 · 계발’이라는 청사진만 제시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다만, 같은 해 7월 연학년(延鶴年)이 조직한 종합예술협회만은 안드레에프(Andreev,L.N.)의 <뺨 맞는 그 자식>을 천도교기념관에서 상연하다가 중지당하였다.

이 극단은 이경손(李慶孫) · 나운규(羅雲奎) 등이 조직하였던 백양회(白羊會)와 합쳐졌기 때문에, 경향극단으로서는 탄탄하였으나 일본경찰의 중지로 해산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이, 미미했던 경향극단활동은 1930년대에 들어 전국적으로 극단이 조직되면서 활기를 띠어갔다.

1930년 11월 대구의 가두극장을 출발로, 이듬해 3월 개성에서 대중극장이, 4월 해주에서 연극공장(演劇工場)이, 6월 서울에서 청복극장(靑服劇場)과 우리들극장이, 11월 서울에서 이동식 소형극장이, 1932년 2월 함흥에서 동북극장과 평양에서 마치극장이, 6월에는 서울에서 극단 메가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들 극단이 모두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지방극단들은 활동이 부진하였고, 서울의 극단들이 지방순회공연을 자주 하였다. 서울에 근거지를 두었던 경향극단들도 당국의 철저한 감시로 공연중지를 당하는 등 실제상의 공연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흥행 성격을 띠었던 메가폰이나 신건설(新建設) · 연극공장 같은 극단들은 여러 번의 공연을 가졌다. 메가폰의 경우, 1932년 6월 서울을 중심으로 <깨어진 장한몽> · <지옥>(金形容 작) · <박첨지>(兪鎭午 작) 등을 공연하고, 인천 · 평양 등 대도시순회공연도 가졌다.

<깨어진 장한몽> 같은 작품은 당국의 감시로부터 벗어나려는 위장술이었다. 지방에서 생긴 경향극단으로서 비교적 공연을 많이 한 극단은 연극공장으로, 주로 박영호 작품인 <10년 전후> · <출옥하던 날 밤> · <흘러가는 무리들> 등을 공연하였다.

그러나 1934년 8월 일제가 신건설사사건이라 불리는 대규모 검거작업을 벌여,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를 기점으로 전국에서 좌익 문인 · 연극인들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경향극단의 활동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다만 일본에서 고려극단 등이 약간 활약한 정도였다.

1930년대에는 경향극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932년 이상춘(李相春) · 강윤희(姜潤熙) · 김태진(金兌鎭) 등이 ≪연극운동≫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경향극을 프롤레타리아 이론으로 무장시키려는 기도가 있었으나, 검열에 걸려 내용이 전면 삭제되는 등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신건설사 사건과 카프의 해산 이후, 대부분의 좌익연극인들은 1935년 동양극장의 설립과 함께 상업주의연극으로 급선회하였으며, 1940년대 전반에는 친일적인 국책극을 쓰기도 하였다.

광복이 되자 경향극은 다시 활발해져서 혼란한 서울의 연극가를 석권하기도 했다. 이들의 연극은 곧 도식적인 이데올로기 선전극으로 전락하고 정치에 예속됨으로써 관객을 잃었고, 6·25전쟁 이후에는 이들이 월북하였다.

이 경향극은 사회의식을 바탕으로 민중을 억압하는 생활조건이나 노동조건에 관심을 가졌고, 민중의 사회적 · 계급적 각성을 일깨우려 노력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연극은 계급투쟁과 이데올로기에만 집중함으로써 민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였고, 또한 일제의 탄압으로 공연활동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였다.

8·15광복 직후 좌우익 연극인들의 분열과 격렬한 싸움은 분단 이상으로 현대연극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참고문헌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 서울대학교출판부, 1966)
『한국현대문학사』(조연현, 성문각, 1980)
『한국현대희곡사』(유민영, 홍성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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