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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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제도
신라시대, 지방의 유력자 출신 군사(軍師)와 그들이 징발하고 통솔하던 지방민 병졸들을 관리하던 군사 조직.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604년(진평왕 26)
주관 부서
23군호
내용 요약

군사당은 신라시대에 지방의 유력자 출신 군사(軍師)와 그들이 징발하고, 통솔하던 지방민 병졸들을 관리하던 군사 조직이다. 신라 23군호 가운데 11번째 군호로서 604년(진평왕 26)에 설치되었으며, 옷깃[금(衿)]의 빛깔은 흰색이었다. 군관으로는 법당화척(法幢火尺) 30명이 배속된 사실만이 확인된다. 명칭에 보이는 군사(軍師)는 신라에서 지방민 유력자가 임명되는 군사적 성격의 관직이므로, 군사당은 이 군사와 그들이 징발・통솔하던 지방민 출신 병졸들을 관리하는 부대로 보인다.

목차
정의
신라시대, 지방의 유력자 출신 군사(軍師)와 그들이 징발하고 통솔하던 지방민 병졸들을 관리하던 군사 조직.
내용

통일신라의 군사 조직인 23군호 중 11번째 군호로서 604년(진평왕 26)에 설치되었다. 옷깃[금(衿)]의 빛깔은 흰색이었다. 한편 군관으로는 『삼국사기』 권 40 직관지(하) 무관조 제군관 부분에서 법당화척(法幢火尺) 30명이 배속된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 중시하여 군사당을 법당군단(法幢軍團)을 구성하는 한 부대로 본 견해가 있지만, 다양한 부대들로 이루어진 법당군단의 실재 자체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이 견해는 성립되기 어렵다.

부대 명칭에 보이는 군사(軍師)는 신라에서 촌주급의 지방 유력자가 임명되는 군사적 성격의 관직이므로, 군사당은 이들 군사와 그들이 징발 · 통솔하는 지방민 출신의 병졸들을 관리하던 부대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군사당은 삼국 사이에 정복전쟁이 격화되면서 신라가 지방민을 병력 자원으로 보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는 목적에서 창설한 군사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군관 조직으로는 법당화척 외에 그 상위에 또 다른 군관들도 배속되어 있었을 법한데, 이와 관련하여 31종의 신라 군관직에 포함된 군사당주군사감이 주목된다. 하지만 이들과 군사당의 상호 관계는 자료가 부족하여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군사당주의 설치 시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기록이 있다. 하나는 제군관조에서 군사당주를 524년(법흥왕 11)년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고, 또 하나는 범군호 군사당조에 군사당을 604년(진평왕 26)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다. 이 두 기록에 관해 524년(법흥왕 11)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맞다고 보는 견해와, 이를 법당주의 오기로 이해하고 군사당이 설치된 604년(진평왕 26)을 설치 시기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논문

이문기, 「신라 법당의 신고찰」(『대구사학』 131, 대구사학회, 2018)
이문기, 「『삼국사기』 ‘법당 관칭 기사’의 새로운 이해: 신라 법당의 재검토를 위하여」(『역사교육논집』 60, 한국역사교육학회, 2016)
이문기, 「7세기 후반 신라의 군제개편과 그 성격에 대한 일시론」(『한국고대사연구』 16, 한국고대사학회, 1999)
이인철, 「신라의 군사조직과 그 운영실태」(『군사』 2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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