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직관지(하) 무관조 범군호 부분에서 552년(진흥왕 13)에 설치한 상주정(上州停)을 673년(문무왕 13)에 개칭한 것으로 기록된 군사조직이다. 그러나 이는 두찬(杜撰)으로 귀당은 이미 진흥왕 대에 창설되어 673년에 이르기까지 상주정과 병존하고 있었다.
562년(진흥왕 23)의 대가야 정복 전쟁에 사다함(斯多含)이 귀당 비장(裨將)으로 출정한 바 있고, 624년(진평왕 46)에는 백제가 속함성 등 6개 성에 침입하였을 때 상주정 · 하주정 · 법당 · 서당 등 4개 부대와 함께 구원병으로 출병한 기록이 보인다.
또 661년(문무왕 1) 7월에 고구려 원정을 위한 행군 군단 편성에서 천존(天存) · 죽지(竹旨) · 천품(天品)이 귀당총관(貴幢摠管)에 임명되어 상주총관에 임명된 품일(品日) · 충상 · 의복 등과 더불어 출정을 준비하였다. 이듬해인 662년(문무왕 2)에는 김유신이 평양으로 인솔한 군량 수송 작전에 귀당이 참전하여 귀당제감(貴幢弟監) 성천 등이 이현전투(梨峴戰鬪)에서 고구려군을 공격하여 죽인 바 있었다.
이어서 668년(문무왕 8) 6월 21일에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행군 군단을 편성할 때도 품일 · 문훈 · 천품이 귀당총관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684년(신문왕 4) 11월에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에서 고구려 유민인 대문이 반란을 일으키자 귀당제감(貴幢弟監) 핍실(逼實)이 참전하였다가 반란군을 진압하는 도중에 전사하였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상의 사례에서 보듯이 귀당은 늦어도 673년까지 상주정과 병존하던 군사 조직이었다. 원래 귀당은 진흥왕 대에 소모병(召募兵)으로 편성된 부대로 창설되어 계속 전투부대로 기능하여 왔다.
673년에 상주정이 그 지역적 존립 기반인 상주가 소멸하면서 폐지되자, 귀당이 상주정의 조직을 이어 받아 새로운 성격의 부대로 변모하면서 군호 6정의 구성 부대 중의 하나로 편제되기에 이르렀다. 귀당에는 장군 이하 16종의 군관들이 배속되어 정연한 지휘 체계를 구성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