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3년( 신문왕 3) 10월 보덕국왕 안승이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 성을 하사받고 왕경(王京)에 거주하게 된다. 남아 있던 대문은 이듬해인 684년(신문왕 4) 11월 금마저에서 반란을 도모하였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대문을 처형한 것은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의 죽음은 오히려 보덕성민의 반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목격한 나머지 사람들이 관리를 살해하고 금마저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684년(신문왕 4) 조에는 대문을 '실복(悉伏)'이라고도 한다는 주석이 있지만, 김영윤(金令胤) 열전에 따르면, 고구려의 남은 적(賊)으로 지칭된 실복은 보덕성을 기반으로 실제 반란을 일으켜 가잠성(椵岑城) 남쪽에 진을 치고 김영윤 등과 전투를 벌이고 있어, 반란을 도모하는 단계에서 처형되었다는 대문의 행적과는 다르다. 「신라본기」 편찬자가 별도의 인물을 동일인으로 오판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신문왕은 토벌군을 보내 성을 함락한 뒤 그 사람들을 남쪽 주군(州郡)으로 사민(徙民)시키고 그 땅에는 금마군(金馬郡)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