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생군삼천당 ()

목차
관련 정보
고대사
제도
통일신라시대, 군호 신삼천당(新三千幢)을 구성하던 부대 가운데 하나.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676년(문무왕 16)
주관 부서
신삼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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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나생군삼천당은 통일신라시대에 군호 신삼천당(新三千幢)을 구성하던 부대 가운데 하나이다. 676년(문무왕 16)에 명주 나생군(지금의 강원도 영월시 영월읍)에 설치되었다. 당시 나당전쟁에서 춘천 · 원주 · 제천 · 단양으로 이어지는 영서로(嶺西路)로 침입하는 당나라와 말갈의 군대를 방어할 목적으로 창설되었으며, 나생군과 그 주변의 지방민들을 소집하여 조직한 군사 조직으로 추정된다.

목차
정의
통일신라시대, 군호 신삼천당(新三千幢)을 구성하던 부대 가운데 하나.
내용

통일신라의 23군호 가운데 23번째 군호인 신삼천당(新三千幢)은 3개 부대로 구성되어 있다. 3개 부대는 우수주삼천당(牛首州三千幢), 나토군삼천당(奈吐郡三千幢), 그리고 나생군삼천당(奈生郡三千幢)이다.

신삼천당은 외삼천당(外三千幢)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는 544년(진흥왕 5)에 왕경에 설치된 삼천당, 곧 구삼천당(舊三千幢) 혹은 내삼천당(內三千幢)에 대응하여 후일 새로 지방에 설치한 군사 조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삼천당은 본래 소모병(召募兵)으로 충원되는 왕경의 보병부대였다가 지방의 주치소(州治所)에 가까운 요충지에 주둔하는 지방부대로 변화 · 개편되어 10정군단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그 변화하는 과정에서 과거 왕경의 삼천당에 대응하는 형식으로 신삼천당이 신설되기에 이르렀다.

신삼천당을 구성하는 3개 부대 가운데 하나인 나생군삼천당은 676년(문무왕 16)에 명주 나생군(지금의 강원도 영월시 영월읍)에 설치되었으며, 나머지 우수주삼천당 및 나토군삼천당과 함께 나당전쟁에서 당나라와 말갈의 군대가 춘천 · 홍천 · 원주 · 제천 · 단양 · 죽령으로 이어지는 영서로(嶺西路)로 침입할 것에 대비하여 방어할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병력 자원은 나생군과 그 주변의 지방민들을 소집하여 조직한 군사 조직으로 추정된다.

다만 창설된 직후에 곧 나당전쟁이 종결되었으므로, 영서로를 통한 외적의 침입이 없었고 그 가능성마저 사라졌으므로, 이 부대가 실제로 군사적 기능을 발휘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설치 이후 곧 유명무실하였을 것이다. 부대를 상징하는 옷깃[금(衿)]의 빛깔은 알 수 없고, 군관 조직도 미상이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단행본

이문기, 『신라병제사연구』(일조각, 1997)
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東洋文庫, 1954)

논문

한준수, 「신라 통일기 신삼천당의 설치와 운용」(『한국고대사연구』 78, 한국고대사학회, 2015)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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